14화

좋은 이유는 손해를 없애지 않았다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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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유는 손해를 없애지 않았다.

아이의 이름은 지켜졌다. 대신 학교 앞에는 모르는 차가 섰고, 한경민의 딸은 아버지가 살인자냐는 문자를 받았다.

피해자 지원센터의 안전회의는 이름 없이 시작됐다. 다빈은 보호 대상의 이름과 학교를 말하지 않았고, 한여름은 그 정보를 묻지 않았다.

“위험코드를 정해야 합니다.” 여름이 말했다. “코드를 아는 사람은 한 명으로 제한합니다.”

“경찰 등록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빈이 말했다.

“등록하지 않으면 즉시 보호 인력을 붙일 수 없습니다.”

“등록하는 순간 아이 이름이 여러 문서에 생깁니다.”

“그래서 비식별 코드와 제한 담당자를 분리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여름은 선택지를 적었다. 이름 없는 위험코드, 지정 담당자 한 명, 학교 주변 차량 정보만 공유, 원문과 가족관계 비공개.

다빈은 코드 이름을 고르라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언니 이름으로 하지 마세요.”

“어떤 이름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빈은 숫자 일곱 자리를 골랐다. ‘재희’도, ‘아이’도 아닌 숫자였다. 보호 대상의 존재를 지우지 않으면서, 이름을 다시 표적이 되게 만들지 않는 방식이었다.

학교 앞 차량 사진은 흐렸다. 번호판 세 자리가 보였지만 나머지는 빛에 번졌다. 여름은 차량 소유자 조회를 바로 요청하지 않았다.

“먼저 사진 원본과 촬영 시각을 보존합니다. 학교 이름은 코드를 연결할 수 있는 담당자만 확인합니다.”

다빈은 그 조건에 서명했다. 안전조치는 시작됐지만, 회색실 전체가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전 10시, 민우는 한경민의 자택 앞에 섰다. 집 앞에는 취재 차량이 한 대 있었고, 현관문 우편함에는 정정문을 요구하는 쪽지가 꽂혀 있었다.

“딸이 등교를 쉬었습니다.” 한경민이 말했다. “학교에서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냐고 물었다고요.”

민우는 세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언론 정정 요청. 근무손실 확인. 가족 정보 삭제 요청.

“셋 다 신청할 수 있습니다. 하나만 선택해도 됩니다.”

“수사팀 협력 사실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그 항목은 빼겠습니다.”

“인터뷰도 안 합니다.”

“알겠습니다.”

민우는 설득하지 않았다. 서류를 받으라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한경민은 근무손실 확인서만 선택했다. 정정 요청은 회사 이름으로 따로 진행하겠다고 했다. 가족 정보 삭제 요청은 딸과 상의한 뒤 정하겠다고 했다.

“사과를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민우가 말했다. “어떤 회복을 원하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 말은 회의실에서 해도 됐겠죠.”

“집 앞까지 온 건 제가 잘못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한경민은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는 근무손실 확인서를 봉투에 넣고, 거절한 인터뷰 동의서를 민우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폐기하세요.”

민우는 문서 파쇄함에 넣었다. 한경민의 거절도 회복 절차의 일부였다.

정오, 회색실 위험판에는 세 줄이 생겼다.

미성년 제보자 접근 위험. 한경민 가족의 직업·학교 피해. 시설업체 홍보계정의 익명 정정 요청.

서진은 각 줄 옆에 보호 대상, 손해 대상, 정정 행동을 나눠 적었다. 다빈의 거짓말은 아이를 보호했지만 한경민을 의심받게 했다. 한경민의 침묵은 아이를 숨겼지만 다빈에게 정정 비용을 남겼다. 서진은 능력 사용을 숨겼고, 그 결과 팀이 분석권을 재배분해야 했다.

여름이 말했다.

“거짓말을 선의와 악의로 나누면 안 됩니다.”

“그럼 무엇으로 나눕니까?” 민우가 물었다.

“누구를 보호했고, 누가 손해를 봤고, 어떤 정정 행동을 했는지.”

서진은 자기 항목의 정정 행동 칸을 비워 두었다. 능력 사용을 기록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잃은 단어와 오독으로 바뀐 사람의 상태까지 후속 조치를 해야 했다.

오후 2시, 홍보계정의 최초 익명 정정 요청이 확인됐다. 시설업체가 외부 홍보대행사에 보낸 문서였고, 한경민의 이름을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관리소장의 개인적 일탈로 인한 사고’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민우가 화를 냈다.

“이건 책임을 한 사람에게 넘기는 문장입니다.”

서진은 문장을 확대했다. 문서 작성 시각은 첫 정정문보다 빨랐고, 회색실이 백상호의 편집 작업을 확인한 뒤에 배포될 예정이었다.

“누군가 한경민을 먼저 범인처럼 만들고, 외부 편집은 사고 뒤의 명예훼손 방지였다고 말하려는 겁니다.”

“그럼 그 계정이 범인입니까?”

“아닙니다. 압박을 만든 계정입니다.”

민우는 대안 가설을 적었다. 회사가 책임을 줄이려 홍보 문서를 만들었다. 백상호가 회사 지시 없이 문구를 전달했다. 제삼자가 회색실의 내부 절차를 이용해 문구를 조정했다.

서진은 각각의 반증 조건을 붙였다. 작성자 접근 로그, 문서 승인자, 배포 예약 시각.

저녁이 되자 다빈은 위험코드의 담당자를 자신이 지정하겠다고 했다.

“여름 씨가 아니라, 제가 믿는 상담사 한 명으로 해 주세요.”

여름은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 상담사가 수사 자료를 보게 되는 건 아닙니다. 안전조치만 맡는다는 서약이 필요합니다.”

“서약을 받으면 이름을 적어야 하죠.”

“이름은 제한된 봉인문서에만 남깁니다.”

다빈은 그 조건을 검토한 뒤 상담사의 이름을 직접 적었다. 수사팀이 보호를 대신 결정하지 않고, 선택권을 실제 담당자에게 돌리는 방식이었다.

한경민은 그날 업무손실 확인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그는 정정문과 함께 재하청 장부도 제출했지만, 딸의 학교와 가족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다.

서진은 그 행동을 영웅적이라고 쓰지 않았다. 보호 대상과 손해 대상을 한 문장으로 합치지 않는 선택이라고 기록했다.

밤 8시, 백상호의 홍보계정이 다음 날 오전 한재희를 비방하는 자료를 배포할 예정이라는 경고가 도착했다. 자료에는 한재희가 불법 자료를 훔치려다 사고를 냈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다빈은 원문 공개를 요구받았다. 언니의 USB와 보호 대상의 이름을 내놓으면 비방을 막을 수 있다는 거래였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빈이 말했다.

“그러면 언니가 계속 비난받습니다.”

“그래도 아이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서진은 다빈의 선택을 대신 칭찬하지 않았다. 여름은 비방 자료의 배포 경로만 보존했고, 민우는 정정 요청을 준비했다.

회색표에서 서진 자신의 정정 행동 칸은 아직 비어 있었다. 능력 출력과 잃은 단어를 공개했지만, 그 비밀이 사건에 남긴 후속 비용을 무엇으로 회복할지는 정하지 못했다.

서진은 빈칸을 지우지 않았다.

비어 있는 것도 현재 상태였다.

다음 날 아침, 위험코드 담당 상담사는 다빈에게 세 가지 연락 방식을 제시했다. 직접 방문, 암호화된 문자, 지정 장소의 봉인함. 다빈은 직접 방문을 거부하고 지정 장소의 봉인함을 골랐다.

“제가 아이를 데리고 오는 방식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그 선택을 기록하겠습니다.” 상담사가 말했다.

“기록이 또 유출되면요?”

“재식별 가능성을 매주 점검하고, 필요하면 코드를 바꿉니다.”

다빈은 숫자 코드를 바꾸지 않았다. 아직 바꿀 이유가 없고, 자주 바꾸면 본인이 관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안전은 보이지 않는 보호가 아니라, 감당 가능한 규칙이어야 했다.

민우는 학교 앞 차량 사진의 원본을 보존하고, 차량 조회는 다빈이 지정한 담당자만 요청하도록 절차를 바꿨다. 수사팀 전체가 차량 소유자를 아는 구조를 피했다.

한경민의 딸은 가족 정보 삭제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아버지의 근무손실 확인서는 회사에 남기기로 했다. 피해를 줄이는 것과 기록을 지우는 것은 같지 않았다.

서진은 그 두 선택을 나란히 적었다. 하나는 이름을 좁히는 선택, 다른 하나는 책임을 남기는 선택.

오전 11시, 홍보대행 계정이 예약한 비방 자료는 배포되지 않았다. 정정 요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니라, 배포 서버의 예약 로그와 승인 계정이 보존됐기 때문이었다. 회색실은 원문을 공개하지 않고도 누가 어떤 문구를 준비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민우가 말했다.

“다빈 씨, 지금이라도 USB 원문을 공개하면 더 빨리 막을 수 있습니다.”

다빈은 잠시 그를 보았다.

“아니요. 더 빨리라는 이유로 아이의 약속을 없애고 싶지 않습니다.”

민우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가 증명할 범위를 줄이겠습니다.”

여름이 회색표에 ‘공개하지 않아도 가능한 조치’를 추가했다. 위험코드, 배포 로그, 작성 계정, 정정 요청 시각. 공개하지 않은 원문이 없어도 피해를 줄이는 행동이 있었다.

서진은 자기 항목에 처음으로 문장을 적었다.

‘능력 사용과 잃은 단어를 회색표에 공개하고, 그 출력으로 발생한 오판은 내가 먼저 정정한다.’

그 행동은 잃은 단어를 돌려주지 못했다. 하지만 능력을 혼자 보관하는 방식은 끝났다.

한경민은 다빈에게 말했다.

“당신의 거짓말 때문에 제가 잃은 건 돌려받지 못할 겁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아이 이름은 말하지 마세요.”

다빈이 그를 보았다.

“그 말은 소장님이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래서 부탁하는 겁니다.”

한경민은 보호를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 다빈도 그 부탁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였지만, 각자 자신의 선택을 자기 이름으로 말하고 있었다.

서진은 안전판에서 학교 앞 차량 사진과 한경민 가족의 삭제 요청서를 분리했다. 같은 거짓말의 비용이었지만, 서로의 이름으로 갚을 수 없는 손해였다.

회색실은 그날 비방 자료의 배포를 막았고, 보호 대상의 이름은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백상호가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정황이 더 선명해졌다.

서진은 빈칸 옆에 작은 문장을 붙였다.

‘보호의 이유가 진범의 도구가 되면, 보호받는 사람의 선택권부터 확인한다.’ 그 문장은 다음 위험판의 첫 줄이 되었다. 그리고 지워지지 않았다. 다음 사람도 읽을 수 있게. 기록은 남았다. 다음 기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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