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민은 회색실이 요구한 자료를 가져오지 않았다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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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민은 회색실이 요구한 자료를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회색실이 숨기고 싶어 할 자료를 들고 왔다.
“재하청 명단과 케이스 수리 장부입니다.”
그는 봉투를 여름에게 내밀지 않고, 공동 봉인 창고의 감식대 위에 올려놓았다. 봉투에는 한경민 자신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민우가 물었다.
“이 자료가 나오면 소장님도 징계 대상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왜 제출합니까?”
“제가 자료를 주는 대가로 제 잘못을 지우면, 다음 사람이 또 같은 방식으로 계약서를 숨길 겁니다.”
서진은 통제선 밖에 서 있었다. 분석권 중지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장부를 보고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한경민이 장부를 펼쳤다. 백상호의 이름은 외주 기사란에 있었고, 그 아래에는 계약서에 없는 야간 작업 세 건이 있었다. 서버 랙 교체, 센서 점검, 원격 접속 확인.
“어느 것이 사건 당일입니까?” 여름이 물었다.
“세 번째입니다.”
“그 사실을 왜 숨겼습니까?”
“건물 관리 책임이 제게 있습니다.”
“그 책임을 숨긴 결과 한재희 씨의 마지막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출합니다.”
한경민은 부품 구매 영수증을 함께 꺼냈다. 비표준 와셔 네 개, 교체 날짜, 작업자 이니셜. A 케이스 오른쪽 바퀴 축의 안쪽에 같은 모양의 와셔가 있었다.
“A가 우리 건물에서 수리한 케이스입니다.”
“기억이 아니라 장부와 부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름이 말했다.
그녀는 경민의 문장을 고치지 않았다. 장부의 날짜와 수리 사진을 독립적으로 확인한 뒤에야 A 케이스를 원래 운반 케이스 후보로 올렸다.
백상호가 반발했다.
“공용 케이스입니다. 수리했다고 소유한 건 아닙니다.”
“소유가 아니라 이동 경로를 확인하는 겁니다.” 민우가 말했다.
감식자가 A 케이스의 바퀴 축을 촬영했다. 와셔 각인은 장부 사진과 맞았고, 교체된 축의 금속색은 다른 세 축과 달랐다. 한경민의 설명이 자기 면책을 위한 사후 조작일 가능성은 남아 있었지만, 수리 장부와 부품 영수증이 그 가능성을 줄였다.
“A를 먼저 채취합니다.” 여름이 결정했다.
“분석관 의견은요?” 민우가 물었다.
서진은 잠시 멈췄다.
“저는 관찰 자료만 제공하겠습니다. 최종 식별은 여름 씨와 한경민 씨가 확인해 주세요.”
한경민은 자신이 제출한 자료를 다시 읽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명단과 케이스 식별을 같은 문서에 남겨야 했다.
밤 23시 26분, 표면 채취가 시작됐다. 바퀴 안쪽, 계단 문턱 높이, 손잡이 아래를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형광 도료는 바퀴 안쪽에서 나왔고, 손잡이 아래에서는 어두운 미세흔이 확인됐다.
감식자가 예비반응지를 들었다.
“혈액 반응 가능성이 있습니다.”
민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지만, 여름이 손을 들었다.
“누구 것인지 아직 말하지 마십시오.”
서진은 통제선 밖에서 결과를 보았다. 케이스가 계단과 접촉했을 가능성, 피해자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동시에 올라갔다. 그것은 백상호가 한재희를 죽였다는 결론이 아니었다. 다만 케이스가 사건의 물리 사슬 안으로 들어왔다.
한경민은 채취 시작 시각을 직접 읽고 서명했다.
“23시 26분 41초. 제가 확인했습니다.”
서진은 그의 이름을 기록했다. 조연이 증거를 건네는 기능이 아니라, 증거가 어떻게 남는지 책임지는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자정 00시 05분, 창고 밖 벤치에서 한경민은 정정문과 재하청 위반 기록을 같은 날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덮으면 안 됩니다.”
“주민들은 재하청 위반만 볼 겁니다.”
“그건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한경민 씨의 이름이 두 기록에 모두 남습니다.”
“남겨 주세요.”
서진은 그에게 물었다.
“다빈 씨에게도 이 자료를 보여 줄 겁니까?”
“제보자 이름이 없는 범위만요. 공개 범위는 다빈 씨와 다시 정하겠습니다.”
다빈이 창고 밖으로 나왔다. 한경민은 그녀에게 용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빈도 사과를 받아 달라고 하지 않았다.
“저는 언니 시간을 늦췄어요.” 다빈이 말했다. “소장님은 그 사실 때문에 의심받았고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 이름은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 선택도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화해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서로가 어떤 비밀을 말하지 않기로 했는지, 그 비밀 때문에 어떤 손해를 감수할지 문서로 남겼다.
서진은 자신의 분석권 중지 사실도 내부 기록에 추가했다. 능력 출력은 질문을 만들었지만, 그 질문을 숨긴 비용 때문에 팀 규칙이 바뀌었다.
그때 한경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백상호가 아니었다. 화면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
‘아이 이름을 주면, 소장님 책임은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한경민은 메시지를 캡처했다. 바로 회색실에 보내지 않고, 다빈에게 먼저 알리겠다고 말했다.
서진은 그 선택을 기다렸다. 보호받는 사람도 거래의 조건을 볼 권리가 있었다.
한경민은 다빈에게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 주지 않았다. 먼저 보낸 사람과 공개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화면만 가렸다가, 다빈이 볼 수 있는 부분을 직접 정했다.
“거래 제안이 왔습니다.”
“누가요?”
“그건 아직 확인 중입니다.”
“아이 이름을 달라는 내용인가요?”
“네.”
다빈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원문을 보고 싶어요.”
한경민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다빈은 화면을 읽고도 바로 울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 아래에 ‘이 내용을 회색실에 전달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적었다.
“전달하세요.”
“이름은 가릴까요?”
“이름은 가리고,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은 남겨 주세요.”
여름은 그 선택을 문서로 만들었다. 보호 대상의 이름과 협박 메시지의 존재를 분리하는 방식이었다. 다빈은 자기 뜻으로 공개 범위를 정했고, 한경민은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를 혼자 결정하지 않았다.
민우가 백상호에게 연락했다.
“한경민 씨에게 면책 거래를 제안했습니까?”
“모릅니다.”
“당신 번호에서 메시지가 전송됐습니다.”
“제 번호를 다른 사람이 썼을 수 있습니다.”
백상호는 다시 계정과 사용자를 나눴다. 이번에는 그 분리가 변명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발신 기록과 실제 사용자를 별도 확인해야 했다.
서진은 메시지의 시간과 케이스 채취 시간을 같은 표에 올렸다. 제안은 채취가 끝난 뒤 도착했다. 범인이 증거 결과를 알고 거래한 것인지, 단순히 경민의 약점을 이용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누가 케이스 채취 결과를 알 수 있었습니까?”
민우가 물었다.
여름은 출입 명단을 확인했다. 창고에는 민우, 여름, 도현, 한경민, 백상호, 회사 법무팀 실무자만 들어왔다. 서진은 통제선 밖에 있었지만, 그녀의 분석권 중지 사실과 채취 위치는 회의록에 남아 있었다.
“팀 내부 정보가 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민우가 말했다.
“가능성만으로 팀원을 조사하면 다시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서진이 답했다. “출입 로그와 문서 열람 기록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민우는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서진에게 직접 조사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여름이 기록을 보고, 도현이 장치 로그를 확인합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권한을 내려놓는 일이 패배처럼 느껴질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판단으로 쓰지 않으려 했다.
감식 결과의 예비 보고서는 다음 날 새벽에 도착했다. A 케이스 바퀴 안쪽의 형광 도료는 8층 계단 도료와 동일 계열이었고, 손잡이 아래 미세흔은 한재희의 혈액과 일치할 가능성이 있었다. 확정 감정 전에는 어느 것도 법적 사실이 아니었다.
한경민은 보고서를 읽고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재하청 명단을 함께 제출했다. 그는 원래 케이스 식별에 사용한 수리 장부가 불법 외주 작업을 입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자료로 제 징계가 빨라질 겁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여름이 말했다.
“그래도 이걸 제출해야 케이스가 살인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서진은 그 말을 듣고 그가 영웅이 되었다고 쓰지 않았다. 자기 책임과 타인의 피해가 서로 상쇄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선택이었다.
민우가 회의록을 읽었다.
“한경민 씨의 자료 제공은 면책 조건이 아닙니다. 재하청 위반과 케이스 식별 증거는 각각 검토합니다.”
한경민은 그 문장에 동의했다.
다빈은 거래 메시지와 자기 공개 선택표를 봉인했다.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대신, 이름을 거래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남겼다.
서진은 봉인 번호를 확인했다. ‘반납’이라는 단어와 사라진 ‘봉투’가 수첩에 나란히 남아 있었다. 능력은 질문을 만들었고, 한경민의 장부와 감식 결과가 그 질문을 물리 기록으로 좁혔다.
하지만 새로운 거래는 사건의 물리 사슬보다 먼저 사람의 선택권을 노렸다. 누군가 케이스를 바꾼 것처럼, 누군가는 한경민의 책임을 지워 주는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져가려 했다.
한경민은 다빈에게 먼저 알리겠다고 말했다. 그 한 문장이 회색실의 수사 순서를 바꿨다. 거래를 증거로 만들기 전에, 보호받는 사람에게 선택권을 돌려주는 순서였다.
오전 9시, 한경민은 주민 대표에게 정정문과 재하청 위반 통지서를 함께 제출했다. 어느 문서도 다른 문서를 대신하지 않았다. 그는 복귀 여부는 회사가 정할 일이고, 자기 이름을 남기는 것은 자신이 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다빈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한경민도 용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선택을 대신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날의 책임을 나누었다. 서진은 그 장면을 사건 후속 기록에 남겼다. 정정은 관계를 되돌리는 문장이 아니라, 다음 사람이 틀리지 않게 만드는 상태 변화였다. 그 기록에는 서진 자신의 분석권 중지도 함께 들어갔다. 비밀을 나누는 것보다 멈출 권한을 남기는 일이 오래 갔다. 그 권한이 다음 질문을 살렸다. 그리고 거래의 방향도 바꾸었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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