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진술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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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호는 서버 비밀번호를 모른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원격 계정은 본사 소유였고, 현장 기사에게는 장비 교체와 상태 확인 권한만 있었다. 문제는 그가 서버를 열 필요가 없었던 이유였다.
민우는 현장 차량 옆에서 백상호의 말을 다시 들었다.
“야간 방문은 안전점검이었습니다. 서버 접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장부를 찾으러 갔습니까?”
백상호는 렌치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어떤 장부 말입니까?”
“불법 재하청 장부.”
“그건 서버와 관계없습니다.”
“질문에 답하십시오.”
“회사 공용 장비입니다. 제가 보관할 의무가 있습니다.”
민우는 서진이 만든 시간표를 탁자 위에 놓았다. 04시 58분 비상키 미반납, 05시 29분 단말기 접속, 05시 32분 계단 센서, 05시 35분 서버 시간 보정.
“장부를 찾은 시간은요?”
“그런 장부는 찾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차량 적재함을 봉인하는 데 동의했습니까?”
백상호의 눈이 적재함으로 갔다. 그는 차량 전체 수색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서버 케이스를 창고로 옮겨 봉인하는 데는 동의했다. 살인과 연결될 수 있는 물건을 지키려는 사람의 행동처럼 보였지만, 다른 설명도 있었다.
“케이스를 열어 볼 수 있습니까?”
“회사 장비라서 안 됩니다.”
“그럼 왜 외관 확인에는 동의했습니까?”
“세척할 필요가 없다는 걸 증명하려고요.”
민우는 그 문장을 적었다. 백상호는 서버 삭제 권한은 부인하면서도, 자신이 가져간 장비의 상태에는 예민했다.
서진은 케이스 바퀴를 촬영했다. 한쪽 바퀴의 고무에 형광색 가루가 붙어 있었다. 8층 계단 도료와 같은 색처럼 보였지만, 육안 비교만으로는 동일성을 정할 수 없었다.
“이걸로 계단에 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민우가 물었다.
“아니요.”
“그럼 뭘 말할 수 있죠?”
“케이스가 형광색 물질과 접촉했다는 것. 접촉 장소와 시점은 아직 모릅니다.”
백상호가 피식 웃었다.
“기계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기계는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사람이 설명을 붙입니다.”
그 말에 백상호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차량 전체를 넘기지 않았다. 대신 케이스를 제삼자 창고로 옮겨 봉인하는 데 동의했다. 동행자는 백상호가 지정한 시설업체 감독자와 회색실의 도현이었다. 민우는 위치 추적 장치를 붙이자고 했지만, 여름은 동의 범위를 확인한 뒤 케이스 외부에만 부착했다.
“케이스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지 않습니다.” 여름이 말했다. “이동 경로와 봉인 상태만 확인합니다.”
“그럼 안쪽을 바꿔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백상호가 물었다.
“그래서 안쪽을 볼 수 있는 조건을 별도 신청하는 겁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무엇을 포기할지 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저녁 6시 20분, 이동 차량 안에서 서진은 ‘계단’이라는 단어를 다시 보았다. 처음에는 도주라는 동사와 붙어 있었다. 이제는 케이스의 바퀴, 문턱 흠집, 서버 랙의 압흔과 붙어 있었다.
그녀는 수첩의 ‘계단=도주’에 선을 그었다.
민우가 운전석에서 물었다.
“그걸 지우는 겁니까?”
“아니요. 제가 그렇게 해석한 기록을 남기는 겁니다.”
“그럼 옆에는 뭐라고 씁니까?”
서진은 잠깐 생각했다.
‘운반?’
물음표를 붙였다.
차량이 지하 램프를 돌 때, 케이스 바퀴의 왼쪽이 문턱에 한 번 걸렸다. 서진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소리만으로 어제 현장을 재현하지 않았다. 도어클로저의 긁힘 높이와 케이스 바퀴 폭을 다음 날 비교해야 했다.
그때 민우의 무전기에 연락이 왔다. 관리실 폐기물 보관함에서 찾은 재하청 장부 일부가 서버 기록과 함께 보존됐다는 내용이었다.
“백상호가 장부를 찾으러 갔다는 건 맞는 것 같군요.”
“장부를 찾았다는 것과 한재희를 만났다는 건 분리해야 합니다.” 서진이 말했다.
민우는 대답하지 않고 차량을 세웠다. 그는 백상호에게 장부를 직접 확인하게 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의 존재와 보존 상태만 통지했다.
백상호가 창고 앞에서 말했다.
“그 장부가 나오면 저는 회사에서 잘립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민우가 말했다.
“가족이 있습니다.”
“그 사정이 장부를 없앨 권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은 사람 사정을 숫자처럼 보죠.”
서진이 대답했다.
“아니요. 사람 사정과 책임을 같은 칸에 넣지 않으려는 겁니다.”
백상호는 서진을 노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리던 순간, 창고 안의 봉인 센서가 울렸다.
케이스 자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창고 뒤편의 작은 문이 열렸다가 닫힌 기록이 남았다. 누가 열었는지는 보안업체 출입카드로 확인해야 했다.
백상호가 먼저 달려가려 했지만 민우가 팔을 막았다.
“지금 들어가면 접촉자가 늘어납니다.”
“누군가 장부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 앞을 보존합니다.”
백상호는 발을 멈췄다. 그는 장부보다 케이스를 먼저 보지 않았다. 케이스보다 창고 뒤편 문을 먼저 보았다.
그 행동은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함은 물리 접근권과 달랐다.
서진은 문손잡이를 촬영했다. 손잡이에는 새로 묻은 기름이 있었고, 바닥에는 케이스 바퀴와 다른 폭의 흙자국이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문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도현은 자국의 폭을 재었다.
“케이스 바퀴는 18센티미터. 이건 7센티미터입니다.”
“사람 신발일까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신발 밑창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민우가 백상호에게 물었다.
“뒤편 문을 알고 있었습니까?”
“창고 관리자가 쓰는 문입니다.”
“오늘 누가 쓰는지요?”
“모릅니다.”
이번에는 백상호의 대답이 너무 빨랐다. 서진은 그 빠름을 거짓말의 증거로 쓰지 않았다. 다만 다음 질문의 순서를 바꿨다.
“장부가 아니라 USB를 본 적은 있습니까?”
백상호의 손이 렌치에서 떨어졌다.
“USB 같은 건 본 적 없습니다.”
민우가 눈을 들었다. 누구도 USB를 언급하지 않았다.
서진은 수첩에 한 문장을 적었다.
‘묻지 않은 물건을 먼저 부인함.’
그 문장은 범행 증거가 아니었다. 하지만 백상호가 숨기는 것이 서버 비밀번호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처음으로 그의 입이 아니라 반응에서 드러났다.
창고 뒤편 문은 봉인됐다. 케이스도 그대로 남았다. 살인과 불법 재하청은 한 사람의 수상함 안에서 분리되었다.
서진은 케이스 바퀴 폭과 계단 문턱 높이를 같은 표에 옮겼다. 다음 날 현장 재현이 필요했다.
그녀는 ‘운반?’ 옆에 작은 화살표를 하나 더 그렸다.
장비가 계단을 지나갔을 가능성.
민우는 창고 밖에서 백상호의 진술을 다시 받았다. 이번에는 질문을 하나씩만 했다.
“04시 58분에 키를 가져간 이유.”
“서버 점검.”
“05시 29분에 단말기가 접속한 이유.”
“장비 상태 확인.”
“재하청 장부를 찾은 이유.”
백상호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장부가 회사에 있으면 안 됐습니다.”
“왜요?”
“계약에 없는 사람을 현장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누가 보냈습니까?”
“본사에서 지시했습니다.”
“지시한 사람 이름은요?”
“모릅니다.”
민우는 한경민을 보지 않았다. 백상호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본사 원격 지시 로그가 필요했다. 그러나 백상호가 장부를 없애려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계약 위반과 증거 훼손 시도를 포함했다.
“장부를 찾으러 왔다고 인정합니까?”
“네.”
“한재희를 만났습니까?”
“아니요.”
“그녀가 계단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백상호의 시선이 창고 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 봉인 번호가 붙어 있었다.
“사람이 있다는 건 봤습니다.”
민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누구를요?”
“얼굴은 못 봤습니다. 계단 아래에서 소리가 났고, 저는 장부를 찾으러 들어갔습니다.”
서진은 진술의 문장보다 행동을 보았다. 백상호는 살인을 부인할 때보다, 계단 아래의 사람을 말할 때 장갑을 벗었다. 손바닥에 묻은 기름을 바지에 문지르는 동작이 세 번 반복됐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민우가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고, 제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도 말하면 장부가 나옵니다.”
“장부를 지키려고 사람을 방치했습니까?”
백상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는 문을 닫았습니다.”
“누구를 두고요?”
“모릅니다.”
서진은 민우에게 손짓했다.
“‘문을 닫았다’의 시각을 먼저 물어 보세요.”
민우는 질문을 바꾸었다.
“몇 시에 문을 닫았습니까?”
백상호는 노트북의 시간 기록을 떠올리는 듯했다.
“05시 33분쯤.”
“정확히는요?”
“05시 33분 41초.”
그는 너무 정확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행동 시각을 외우고 있었다.
도현이 바로 서버 로그를 확인했다. 05시 33분 41초에는 원격 세션이 열려 있지 않았다. 대신 비상계단 센서의 닫힘 이벤트가 05시 32분 31초에 끝났다. 백상호가 문을 닫았다는 시각은 센서 기록과 1분 10초 차이가 났다.
“센서 시간과 단말기 시간이 다릅니다.” 백상호가 말했다.
“그래서 두 시간축을 함께 보겠습니다.” 도현이 답했다.
“한재희를 만났습니까?”
“아니요.”
“그녀가 계단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USB를 먼저 부인했습니까?”
백상호의 입술이 굳었다.
민우가 그 선택을 알아차린 듯 서진을 보았다. 질문을 다시 시간표로 돌렸다.
백상호는 결국 말했다.
“USB가 있었습니다. 한재희가 들고 있던 건지, 다른 사람이 들고 있던 건지는 모릅니다. 저는 장부와 같이 가져가려 했습니다.”
“왜 경찰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장부가 나오면 제 이름도 나옵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나왔습니까?”
백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택은 살인을 숨기려는 계획과는 달랐지만, 사람이 계단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도 자신의 계약 위반을 지키려 한 방치였다.
민우는 진술을 마친 뒤 서명란을 백상호에게 밀었다.
“당신의 말은 살인 무죄 확인서가 아닙니다.”
“압니다.”
“장부를 없애려 한 사실과 사람을 방치한 사실을 분리해 기록합니다.”
백상호는 장갑을 벗고 서명했다. 손등의 형광색 가루가 종이 가장자리에 묻었다.
서진은 그 가루를 채취하지 않았다. 전날 계단의 물질과 동일한지 별도 검증이 필요했다.
그날 밤, 창고의 봉인 센서와 계단 도어클로저의 시간축을 맞추는 작업이 시작됐다. ‘계단’은 더 이상 도주만을 뜻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을 닫고, 장비를 옮기고, 자신이 본 사람을 말하지 않은 장소였다.
서진은 수첩의 물음표를 지우지 않았다. 틀린 방향에서 돌아온 경로까지 남기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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