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열쇠가 아닌 계약서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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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린은 보관실 열쇠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가방 안쪽에서 얇은 계약서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여러 번 접혔다 펴져 모서리가 희었다. 태경은 제목을 읽기 전에 날짜를 봤다. 전시회 물량을 선매출로 돌리기 전, 은박 라인 센서가 멈추기 시작한 주였다.

‘설비 양수도 예약.’

매수인은 나린패키징이 아니었다. 나린 개인 명의의 채무를 대신 갚아 주는 조건으로, 회사 소유의 은박 라인 일부 설비를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계약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반출일은 다음 주였다.

나린은 계약서를 테이블에 놓고도 손을 떼지 못했다.

“이건 아직 팔린 게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공장을 살리려고 한 거예요.”

“회사의 설비를 대표 개인 채무와 바꾸는 방식으로요?”

나린의 입술이 굳었다. 회의실 창문 밖에서는 무지 포장 상자가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그 느린 라인이 오늘 공장을 버티게 했고, 계약서에 적힌 은박 설비는 아직 멈춘 채였다.

“내가 빌린 돈으로 설비 대금을 먼저 냈어요. 회사가 갚을 수 없게 됐을 때, 그쪽에서 설비로 받겠다고 한 겁니다.”

“회사 결재는?”

“없어요.”

“채권자 통지는?”

“없어요.”

나린은 두 번 대답하고 나서야 의자에 앉았다. 긴 설명을 붙이면 사정이 더 납득될 것 같았지만, 태경은 설명을 빼앗지 않았다. 개인 돈으로 회사를 버텼다는 사실과 회사 설비를 개인 채무로 넘기려 했다는 사실은, 한 문장으로 상쇄되지 않았다.

“왜 지금 보여 줍니까?” 태경이 물었다.

“계약서 원본이 보관실에 있었어요. 오늘 매수인 쪽에서 반출 일정을 확인하겠다고 연락했어요.”

“그래서 지우기 전에 보여 준 겁니까?”

나린은 고개를 들었다. “지우면 안 된다는 건 이제 알아요.”

그 말은 용서가 아니었다. 다만 어제 고객에게 경쟁사 연락처를 알려 준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라, 태경은 성급히 의심을 사실로 바꾸지 않았다.

오지석이 들어와 계약서의 설비 목록을 보았다. 은박 라인 가드 장치, 절단부, 제어판.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가격이 아니었다.

“이거 빠지면 무지 포장도 멈춥니까?”

현장 반장이 목록을 넘겨받아 말했다. “제어판은 공유됩니다. 은박 라인만 떼 가는 게 아니에요.”

나린이 급히 말했다. “그쪽도 아직 정확히 모르고—”

“계약서에는 적혀 있습니다.” 반장이 말했다. “반출 대상이라고.”

지석은 계약서를 덮지 않았다. “이 설비가 나가면, 작업자들한테 누가 말합니까?”

“내가 말하겠습니다.” 나린이 말했다.

“언제요?”

“오늘.”

태경은 그 답을 기다렸다. 대표가 숨긴 계약을 보여 준다고 해서, 그 다음 설명까지 자동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는 종이 위에 세 줄을 그었다. 계약 취소 통지, 회사 자산과 개인채무 경계 공개, 반출 가능 설비의 기능 확인.

“취소가 먼저입니까, 공개가 먼저입니까?” 나린이 물었다.

“취소 의사를 기록하고, 반출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 공개합시다. 그러나 오늘 안에요.”

“매수인이 거절하면요?”

“그때는 회사 자산이 위험하다는 사실도 같이 공개해야 합니다.”

나린은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매수인에게 전화하기 전에 번호를 한 번 지웠다가 다시 눌렀다. 통화는 짧았다.

“예약을 취소하겠습니다. 설비는 회사 자산이고, 제 개인채무와 섞을 수 없습니다.”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린의 손가락 마디만 하얘졌다.

“위약금이 있으면 제 이름으로 청구하세요. 회사 계좌에는 넣지 마세요.”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거절했습니까?” 태경이 물었다.

“취소는 받겠대요. 대신 위약금은 이번 주 안에.”

“얼마입니까?”

나린은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계약서 마지막 장을 열어 태경 쪽으로 돌렸다. 위약금은 현재 남은 현금의 절반을 넘었다.

회계 담당자가 숨을 삼켰다. “그걸 내면 임금이—”

“개인채무입니다.” 나린이 말했다. “회사 현금으로 내지 않겠습니다.”

태경은 그 말을 기록했다. 개인이 낼 수 있다는 말은 회사가 안전해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나린이 위약금을 내지 못하면 매수인은 다시 설비를 요구할 수 있고, 그녀가 개인 돈으로 내면 대표 권한과 회사 자산의 경계는 더 복잡해진다.

“개인채무 내역도 같은 표에 올려야 합니다.” 태경이 말했다.

“직원들 앞에요?”

“직원들에게 개인 금액을 공개하자는 게 아닙니다. 회사 자산에 어떤 청구가 걸렸는지, 대표가 어떤 제한을 받는지 알려야 합니다.”

“내 빚 때문에 회사를 망쳤다고 말하라는 거군요.”

“회사 자산을 개인 채무에 묶으려 했다는 사실을 말하자는 겁니다. 그 다음 책임은 계약과 기록으로 나눠야 하고요.”

나린은 계약서 첫 장을 접지 않았다. 그녀는 회의실 벽의 뒤집힌 은박 견본을 보았다. 브랜드를 지키려고 남겨 둔 설비가, 이제는 자신의 개인채무를 가리는 장막이 되어 있었다.

오후 회의에는 현장 반장, 회계 담당자, 작업자 대표 두 명이 들어왔다. 나린은 맨 앞에서 말했다.

“회사 설비 일부를 제 개인채무와 연결한 계약이 있었습니다. 오늘 취소 통지를 했고, 반출은 막았습니다.”

회의실은 조용했다. 누군가 화를 내지 않아도, 말은 충분히 무거웠다.

“그럼 다음 주에 기계가 나갈 수도 있었어요?” 작업자 대표가 물었다.

“그럴 수 있었습니다.”

“우리한테 말 안 하고요?”

“네.”

나린은 변명하지 않았다. 태경은 그녀가 ‘공장을 살리려 했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을 봤다. 그 말은 사실의 일부였지만, 오늘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지석이 작업자 대표에게 설비 목록을 보여 줬다. “아직 반출은 없고, 취소 통지 기록은 있습니다. 다음은 이 설비가 어떤 공정에 연결되는지 현장 확인을 남기는 겁니다.”

“대표가 또 팔지 않는다는 보장은요?”

나린이 답했다. “이제 설비 처분이나 담보 제공은 대표 단독으로 못 하게 하겠습니다.”

“누가 막습니까?”

“회계 사실 확인, 현장 기능 확인, 그리고 작업자 열람이 없으면 진행하지 않는 조건으로요.”

태경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열람은 동의가 아니고, 대표가 권한을 줄이겠다는 말은 아직 문서가 아니었다.

“그 조건은 지금 협상할 일입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취소 통지와 현재 자산 상태를 확인합니다.”

나린은 그 말에 잠깐 눈을 감았다. 자신이 제안한 제한조차 바로 칭찬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협상하겠습니다.”

현장 반장은 설비 목록을 들고 작업장으로 나갔다. 지석은 교대 보드의 은박 라인 칸 아래에 자석 하나를 더 붙였다. ‘설비 반출 확인 전 재가동 불가.’ 안전 부품이 와도, 설비 소유가 흔들리면 작업자는 다시 기계 앞에 설 수 없었다.

나린은 회의실에 남아 계약서 원본을 투명 파일에 넣었다. 서랍에 감추지 않고, 취소 통지서와 함께 보관했다. 개인채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회사 설비를 몰래 데려가는 길은 오늘 문서 위에서 막혔다.

그러나 파일을 닫는 순간, 나린은 다음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위약금을 개인 돈으로 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 돈을 내기 위해 다시 회사 이름을 빌리려 하지 않을 수 있는지였다.

태경은 그녀에게 답을 대신 만들어 주지 않았다. “개인채무 표는 대표님이 만들고, 회사 표에는 회사가 부담하는 것만 적으세요. 두 표가 다시 만나는 순간은, 다른 사람에게 먼저 알려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다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처럼 나중에 발견되는 방식은 막을 수 있습니다.”

나린은 빈 종이를 꺼내 개인채무라고 적었다. 첫 줄에는 위약금, 둘째 줄에는 설비 대금으로 먼저 쓴 돈, 셋째 줄에는 아직 말하지 않은 보증 항목이 있었다. 세 번째 줄에서 그녀의 펜이 멈췄다.

태경은 종이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개인 정보였고, 진단 범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린이 회사 설비에 청구가 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순간, 금액을 보지 않아도 경계는 회사 쪽으로 넘어왔다.

“그 항목이 회사 자산을 담보로 합니까?”

나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아직은이란 말은 문서에서 가장 비싼 말입니다.”

그녀는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세 번째 줄 옆에 ‘회사 자산 담보 불가, 별도 확인’이라고 적었다. 그것이 채무를 없애 주지는 않았다. 다만 다음에 누군가 전원함 열쇠와 개인 독촉장을 같은 가방에 넣으려 할 때, 먼저 멈출 문장이 생겼다.

작업자 대표가 돌아와 말했다. “이 설비가 나가면 무지 포장도 멈춘다고 했죠. 그럼 우리한테는 이 계약 취소가 임금이랑 연결된 일입니다.”

나린은 고개를 들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약 내용까지 봐야 합니까?”

“개인 금액은 안 봐도 됩니다.” 태경이 말했다. “회사 설비가 반출 대상이었고, 지금은 취소 통지가 갔으며, 반출 전에는 기능 확인과 통지가 필요하다는 사실만 보시면 됩니다.”

작업자 대표는 그 설명을 듣고도 바로 안심하지 않았다. “대표가 다시 계약하면요?”

나린이 말했다. “그때는 대표 혼자 진행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겠습니다.”

“만들겠다는 말 말고요.”

나린의 손이 파일 위에서 멈췄다. 그 질문은 맞았다. 그녀는 오늘 계약을 취소했지만, 권한이 그대로면 내일 다른 계약을 쓸 수 있었다.

“오늘 안에 초안을 만들고, 내일 회계와 현장, 작업자 대표가 함께 보게 하겠습니다.”

태경은 그 약속을 문서에 넣지 않았다. 대신 회의록에 ‘대표 단독 설비 처분 제한안: 초안 작성, 독립 검토 전 미확정’이라고 적었다. 나린은 그 표현을 보고 한 번 숨을 내쉬었다. 아직 얻지 못한 신뢰를 받은 것처럼 쓰지 않는 문장이었다.

해가 질 무렵, 매수인 쪽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위약금 납부 기한을 앞당기겠다는 통보였다. 나린은 전화를 받고도 회사 계좌를 열지 않았다. 개인채무 표의 첫 줄 옆에 새 날짜를 적고, 회의록에 ‘대표 개인 일정, 회사 현금과 분리’라고 남겼다.

공장 안에서는 무지 포장 라인의 테이프 소리가 짧게 이어졌다. 은박 라인은 여전히 멈춰 있었고, 그 옆 교대 보드에는 안전 확인과 설비 반출 확인 두 개의 재확인 자석이 붙어 있었다. 나린은 그 자석들을 보며 처음으로, 간판을 지키는 일이 자기 혼자 열쇠를 쥐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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