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소할 수 있는 돈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4. 23.
2화. 취소할 수 있는 돈 윤태경은 자료실 문을 닫고도 한동안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복도에서는 회의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결재가 멈춘 이유를 찾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미 이유를 한 사람의 성격으로 줄여 놓고 있을 것이다. 태경에게 남은 시간은 한 시간이었다. 열한 시가 되면 보류된 자금확인서는 ‘확인 중’이 아니라 ‘거래를 깨뜨린 문서’가 된다.
그는 재고표 세 장을 책상 위에 나란히 펼쳤다. 전일 마감표, 당일 출고 예정표, 반품 격리표. 첫 생의 기억에서는 윤성정밀이 오후 두 시에 전화를 끊었다. 결품이 나서가 아니라, 결품을 숨긴 회사가 납기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기억은 날짜만 남겼다. 오늘 고객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종이에서 다시 찾아야 했다.
민수가 문턱에 기대 섰다. “고객 쪽에 전화할 겁니까?”
“전화하기 전에 물건부터 확인해야죠.”
“그쪽은 지금 우리 사정부터 물을 텐데요.”
“그러면 우리 사정을 말하지 말고, 오늘 못 받으면 뭐가 멈추는지 물어봐요.”
민수는 손에 든 출력물을 흔들었다. “고객은 그런 질문 싫어합니다. 급하다는 말 들으면 가격부터 깎거든요.”
“그럼 깎을 권리도 같이 주면 됩니다.”
민수의 눈썹이 움직였다. 태경은 전일 마감표의 품목 번호를 지웠다. 기억 속 수량은 480개였지만 현재 표에는 610개가 적혀 있었다. 숫자가 더 많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반품 격리표에는 같은 품목 190개가 따로 잡혀 있었다. 외관 불량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창고에서는 외관 불량도 출고가 급하면 정상 재고가 된다.
“이 190개, 누가 격리했어요?”
“품질팀이요. 어제 저녁에.”
“그럼 610개가 아니라 420개예요.”
“아직 판정 안 났습니다.”
“판정 안 난 건 고객한테 팔 수 없어요.”
민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로 생산관리 대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가 누구의 지시를 받는지보다 누구에게 답을 받아낼 수 있는지가 먼저 움직였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조립 대기분 160개, 완성 가능 시각 오후 다섯 시 이후. 태경은 그 숫자도 옆에 적었다. 오전에 약속할 수 있는 수량은 420개뿐이었다.
기억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맞는 방향과 맞는 답은 달랐다. 그는 손실장부의 마지막 빈 줄을 떠올렸다. 장부는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군가의 돈을 쉽게 쓰게 만들면, 그 뒤에 남는 비용만 적었다.
“윤성정밀은 왜 이 부품이 급합니까?”
민수가 웃지도 못한 얼굴로 말했다. “그쪽도 자기 납품이 걸려 있으니까요. 오늘 못 받으면 자기네 조립 라인이 멈춰요. 그런데 그걸 우리가 알아도, 우리가 납품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죠.”
“맞아요. 그래서 못 지킬 약속은 안 합니다.”
“그럼 뭘 팔아요?”
태경은 빈 종이를 민수 쪽으로 돌렸다. ‘420개. 선입금. 내일 오전 출고. 지연 시 자동 취소.’
민수는 종이를 읽고 고개를 저었다. “전액 선입금은 안 됩니다. 한림리빙 이름으로 먼저 돈 보내는 건, 고객 입장에선 지갑을 불 속에 넣는 거예요.”
“그럼 얼마면 넣겠답니까?”
“제가 묻는다고 대답할 고객이 아니에요.”
“그래도 전화는 민수 씨가 하죠.”
그 말에 민수의 손이 멈췄다. 태경은 그가 고객 명단을 자기 생존선처럼 쥐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첫 생에서 민수는 한림리빙이 무너지기 전에 명단을 들고 떠났다. 태경은 그를 배신자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민수에게는 퇴직금도, 확인 가능한 출고 약속도 없었다. 살아남는 쪽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전화는 제가 할게요.” 민수가 말했다. “대신 조건은 제가 고릅니다. 고객 앞에서 회사 편 드는 영업사원처럼 보이기 싫으니까.”
태경은 종이를 당겨 그 앞에 놓았다. “고르세요.”
민수는 펜을 들어 ‘전액’을 두 줄로 지웠다. 그리고 ‘최소 생산분 예치’라고 적었다. 420개 전부가 아니라, 고객이 먼저 필요한 120개분만 맡기게 하자는 뜻이었다. 다음 줄에는 ‘내일 오전 열 시까지 미출고 시 자동 취소 및 전액 반환’이라고 덧붙였다.
“이러면 회사가 손해 봅니다.” 태경이 말했다.
“손해 안 보는 거래면 고객도 안 받죠. 우리한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고객이 취소할 수 있어도 입금할 이유입니다.”
태경은 수정된 조건을 읽었다. 민수는 회사의 현금 구멍을 메워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고객이 손해 보지 않을 범위에서만 회사를 시험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 조건이 더 현실적이었다.
전화는 영업 회의실에서 걸었다. 회의실 유리문 너머로 팀장이 두 번 지나갔다. 민수는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에 태경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말은 제가 시작합니다. 윤 대리님은 숫자 나오면 받으세요. 미래 얘기하면 끊습니다.”
“미래 얘기 안 합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연결음이 길었다. 세 번째가 끝날 때쯤, 윤성정밀 구매팀장 박정우가 전화를 받았다. 민수의 목소리는 복도에서 들리던 것보다 한 톤 낮아졌다.
“팀장님, 한림리빙 최민수입니다. 네, 그 얘기부터 하셔도 됩니다. 오늘 출고 약속 못 믿으시는 거, 맞습니다.”
태경은 고개를 들었다. 민수는 고객의 화를 막지 않았다. 먼저 자리를 내줬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민수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그는 태경 쪽으로 메모지를 밀었다. ‘기존 두 번 지연. 이번에도 지연이면 대체업체 전환.’
태경은 120이라는 숫자 아래에 ‘내일 10시’를 적었다. 민수는 그 숫자를 보고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420개는 못 약속합니다. 120개만 말씀드리죠. 내일 오전 열 시 전에 못 보내면 자동으로 취소하시고, 맡기신 돈은 바로 돌려드립니다. 먼저 넣으실 돈도 120개분만 받겠습니다.”
잠시 뒤 민수는 한쪽 눈을 감았다. 고객이 무언가를 물은 모양이었다.
“왜 우리가 그러냐고요? 그건 저도 묻고 싶은데요. 지금 회사가 급해서가 아니라, 팀장님 라인이 오늘 멈추면 저희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해도 못 믿으실 테니까요.”
그는 수화기를 태경 쪽으로 내밀었다. “재고 수량 확인해 달랍니다.”
태경은 받자마자 말했다. “완제품 기준 420개입니다. 다만 오늘 출고 가능한 건 검사 완료분 120개뿐입니다. 나머지는 품질 판정이 끝나기 전까지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합니까?”
“내일 아침에 말하면 취소권도 늦으니까요.”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태경은 그 침묵을 설득으로 메우지 않았다. 고객이 거절해도 되는 자리를 남겨 둬야 했다.
박정우가 말했다. “예치금은 넣겠습니다. 대신 입금 확인되면 생산표와 창고 확인 사진 보내세요. 그리고 한 시간 안에 서면 조건서. 하나라도 빠지면 취소입니다.”
민수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입금이 아니라 조건이 먼저 들어왔다. 그래도 고객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통화가 끝난 뒤 민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팔립니다. 다만 우리 회사가 아니라 조건이요.”
“그게 더 오래 갑니다.”
“그 말, 고객 앞에서는 하지 마세요. 너무 자신 있어 보이면 또 불안해합니다.”
태경은 조건서 양식을 열었다. 현금이 들어오면 회사를 살리는 돈이 아니라, 고객이 내일 아침까지 회사에 붙여 둔 시험지가 된다. 그 시험지를 통과하려면 창고의 120개가 실제로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물건을 옮길 권한을 줘야 했다.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새 메일 알림이 떴다. 제목은 짧았다.
‘요청 권한 확인 필요.’
입금 알림보다 먼저, 은행은 그가 누구인지 물었다.
태경은 조건서 첫 줄에 회사 이름보다 고객 이름을 먼저 적었다. 윤성정밀이 맡기는 돈, 윤성정밀이 취소할 수 있는 시간, 윤성정밀에게 돌려줄 책임. 한림리빙이 돈을 받는 문서였지만, 문서의 주어는 고객이어야 했다.
민수는 자동 취소 문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팀장님이 지우면요?”
“고객도 안 넣겠죠. 이미 우리 사정을 압니다.”
태경은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전산 재고는 선반의 물건보다 먼저 도착하곤 했다.
둘은 창고로 내려갔다. 통로에는 반품 상자가 세 줄로 쌓여 있었고, 작업자는 바코드를 찍다가 태경을 흘겨봤다. 자금팀 사람이 창고까지 내려오면 대개 물건을 옮겨 달라는 말보다 비용을 묻는 말이 따라왔다.
“윤성정밀 건, 검사 완료분 어디 있습니까?”
작업자는 지게차 열쇠를 손에서 굴렸다. “완료분이면 저쪽 B열인데요. 출고 지시는 아직 안 떨어졌습니다.”
“지시 내리러 온 게 아닙니다. 있는지만 보러 왔어요.”
그 말에 작업자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는 선반 맨 아래쪽을 가리켰다. 상자 열두 개가 있었다. 태경은 상자 하나를 열어 봉인 테이프와 검사표 날짜를 맞췄다. 전일 마감표에는 없던 재검사 도장이 두 상자에 찍혀 있었다.
“이 두 개는 왜 다시 검사합니까?”
“운반 중에 모서리 찍혔다고 고객 반품으로 돌릴 수도 있어서요. 출고 못 합니다.”
태경은 조건서의 120을 100으로 고쳤다. 민수가 옆에서 욕설을 삼켰다.
“백 개면 예치금도 줄어듭니다.”
“줄어도 됩니다. 못 보내는 스무 개까지 팔면 내일 백 개도 못 팝니다.”
작업자는 말없이 재검사 상자를 뒤로 밀었다.
민수는 고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길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팀장님, 백 개입니다. 두 상자는 품질 재확인이라 빼겠습니다. 조건도 백 개 기준으로 다시 보내겠습니다. 지금 취소하셔도 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질문이 이어졌다. 민수는 한 번 태경을 보고, 한 번 창고의 상자를 봤다.
“아니요. 내일 열 시 약속은 그대로입니다. 대신 생산표와 검사표를 같이 드립니다. 그걸 못 드리면 예치금도 받지 않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민수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윤성정밀 구매팀장이 보낸 짧은 답장이었다. ‘조건서 수신 후 100개분 예치. 출고 전 사진 필수.’
태경은 수정한 조건서를 보내고, 창고 번호와 검사표 사진을 첨부했다. 고객이 요구한 사진에는 상자 수만 보이게 찍지 않았다. 재검사로 빠진 두 상자도 통로 끝에 남겨 두었다. 감출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더 비싼 비용이 됐다.
십 분 뒤, 자금팀 모니터에 입금 알림이 떴다. 금액은 작았다. 임원 한 명의 월 보너스보다도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돈에는 내일 열 시라는 마감과 자동 취소라는 칼날이 붙어 있었다.
태경은 처음보다 작은 금액을 조건서 옆에 적었다. 과거에는 그 숫자가 기억보다 작다는 사실이 패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은 달랐다. 틀린 수량을 지운 자리 덕분에, 고객은 자기 돈을 어디까지 걸 수 있는지 알았다.
모니터 오른쪽 위에는 은행 메일이 여전히 떠 있었다. 요청 권한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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