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1서명란의 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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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란의 빈칸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4. 22.

출소하는 날, 윤태경이 돌려받은 것은 손목시계와 구겨진 작업복, 그리고 어머니 장례비 영수증 한 장이었다.

영수증 뒷면에는 누군가가 볼펜으로 날짜를 적어 두었다. 그 날짜에 그는 법정에 있었고, 어머니는 장례식장에 있었다. 두 장소 사이를 잇는 것은 거짓말 한 줄이었다. ‘잔액 확인 완료.’

태경은 교도소 정문 앞 버스정류장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판결문을 폈다. 회사는 부도를 냈고, 임금은 밀렸고, 거래처는 손해를 떠안았다. 판결문은 경영진 지시와 회계 조작을 길게 적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 자금확인서의 확인자 칸에는 윤태경의 이름이 있었다.

그는 그 이름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변명이 생겼다.

그날도 팀장이 말했다. 다들 결재했으니 너는 잔액만 확인하면 된다고. 그는 계좌 원본을 보지 못했지만,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월말이었고, 아버지 공장에 납품대금이 막혔고, 대리 승진 얘기가 돌았다. 한 번만 넘기면 된다는 말이 가장 값싼 말이었다.

버스 도착 안내음이 울렸다.

동시에 휴대전화 알림음이 울렸다.

태경은 고개를 들었다. 버스는 없었다. 대신 형광등 아래 결재실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자금확인서 세 부와 파란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벽시계는 오전 9시 55분을 가리켰다.

열두 해 전이었다.

손끝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서류 오른쪽 아래를 봤다. 수취인 계좌, 거래번호, 확인자 칸. 아직 빈칸이었다.

“윤 대리.”

맞은편에 앉은 최민수가 말을 꺼냈다. 민수는 아직 입사한 지 일 년도 안 된 얼굴이었다. 넥타이는 매듭이 비뚤어져 있었고, 손에는 팀장실에서 받아 온 사내 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팀장님이 십 분 안에 올리라십니다. 은행 쪽도 기다린다고 하고요.”

태경은 종이를 뒤집었다. 뒤쪽에는 당일 현금 잔액표가 붙어 있었다. 숫자는 기억보다 더 깨끗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잔액표에는 돈이 있었다. 실제 계좌에는 없었다. 빠진 것은 한 줄의 이체였다.

첫 생의 그는 이 종이를 보고 안심했다. 숫자가 인쇄되어 있으면 누군가 확인했을 거라고 믿었다. 믿은 쪽이 아니라 확인란에 이름을 적은 쪽이 책임을 졌다.

“은행은 누가 기다립니까?”

민수가 눈을 깜빡였다. “네?”

“담당자 이름이요. 대출 연장 담당자. 아니면 팩토링 담당자.”

“최 과장님이랑 통화하신다던데요.”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없다는 뜻이었다. 은행이 기다린다는 말은 보통 은행이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은행 이름을 빌려 사내에서 시간을 빼앗고 있을 때 쓰는 문장이었다.

전화가 울렸다. 민수가 받자마자 허리를 세웠다.

“네, 팀장님. 윤 대리 지금… 네.”

민수는 수화부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태경을 봤다. “지금 올려 달랍니다. 전무님도 회의실에 계시고요.”

태경은 펜을 들었다. 민수의 얼굴에 아주 짧은 안도감이 스쳤다. 이 서류가 올라가면 자기 몫의 재촉도 끝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민수의 잘못이 아니었다. 막내는 대개 서류보다 먼저 도망갈 길을 배운다.

태경은 확인자 칸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적었다.

‘원본 계좌 잔액 및 수취인 확인 전 결재 불가.’

펜 끝이 종이를 눌렀다.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 하나로 그는 이번 달의 평온, 팀장의 신뢰, 대리 승진의 가능성을 동시에 밀어냈다.

민수가 수화부를 내려놓았다. “윤 대리님, 이러면 거래 끊길 수도 있습니다.”

“끊기면 끊기는 이유를 적으면 됩니다.”

“그게… 지금은 다들 빨리 처리하자는 분위기라.”

“누가 확인했는지 적힌 게 없잖아.”

태경은 잔액표의 하단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작성자와 검토자의 날인은 있었지만, 원본을 본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결재선은 세 줄이었고 책임은 공중에 떠 있었다.

민수가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는 팀장 지시를 전달한 사람이지, 대신 확인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아니었다. 한참 뒤 민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는 뭐라고 말씀드리면 됩니까?”

첫 생이라면 태경은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했을 것이다. 그 말은 일을 가져오는 말이기도 했고, 나중에 책임을 혼자 감추는 말이기도 했다.

“제가 원본 확인을 요청했다고 말해요. 민수 씨가 확인했다는 말은 하지 말고.”

민수의 입술이 굳었다가 풀렸다.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다시 들었다. 팀장에게 뭐라고 말할지 고르는 동안 태경은 결재 시스템을 열었다. 마우스가 낯설 정도로 가벼웠다. 첫 생에 그는 이 화면을 수백 번 열었지만, 의견란은 늘 비워 두었다. 빈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기록처럼 보였고, 나중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통로가 되었다.

태경은 전표번호와 수취 계좌의 끝 네 자리를 적었다. 그리고 ‘현금 유입 근거 미첨부. 원본 계좌 조회 요청.’이라고 남겼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문구를 한 번 지웠다가 다시 썼다. 너무 길면 변명이 되고, 너무 짧으면 누군가가 자기 뜻대로 채운다.

전송.

화면 오른쪽에 기록 시각이 찍혔다. 09:58.

그 시각은 첫 생에는 없었다.

팀장실 문이 열렸다. 최성호 팀장이 복도 끝에서 걸어 나왔다. 팔에는 재킷을 걸쳤고, 휴대전화는 귓가에 붙어 있었다. 그는 태경을 보자 통화를 끊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회의실 방향을 가리켰다.

태경은 서류를 들고 일어섰다. 민수가 뒤에서 낮게 말했다.

“윤 대리님, 진짜 은행에서 문제 삼으면요?”

“그럼 은행이 문제 삼았다는 기록이 생기겠지.”

그 대답은 용감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겁이 났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니라 문서가 먼저 남아야 했다.

복도 공용 프린터에서는 재고표가 한 장씩 밀려 나왔다. 맨 위 품목 옆에 빨간 글씨가 찍혀 있었다. 윤성정밀 납품분, 결품 예상.

태경은 그 글씨를 보고 멈췄다. 첫 생의 그는 결재실에서 나온 뒤 그 고객이 전화를 끊은 날짜를 기억했다. 하지만 기억은 오늘의 주문서를 보여 주지 않았다. 고객이 아직 끊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정했다.

회의실 문 앞에서 팀장이 손을 내밀었다.

“서류.”

태경은 결재판을 건네지 않았다. 대신 의견란이 열린 화면을 보여 주었다.

“원본 계좌 확인이 먼저입니다.”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윤 대리, 지금 거래를 멈추자는 거야?”

“아닙니다. 확인 없이 제 이름으로 넘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태경은 그 소리를 들으며, 이번에는 회사를 살리겠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막을 것은 회사의 파산이 아니었다.

자기 이름이 남는 방식이었다.

팀장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방금 전까지 귀에 붙어 있던 기계가 사라지자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원본은 재무본부에서 확인했어. 자금팀이 여기서 붙잡고 있을 건 아니지.”

“그러면 재무본부 확인자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지금 나한테 책임을 묻겠다는 거야?”

태경은 회의실 문틈을 봤다. 안쪽에서 누군가 종이를 넘겼다. 서류가 움직이는 소리는 늘 책임보다 빨랐다. 그는 태블릿 화면을 들어 보였다. 의견란에는 전표번호와 조회 요청 시각이 남아 있었다.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누가 확인할지 적자는 겁니다. 제가 못 본 계좌를 봤다고 쓸 수는 없습니다.”

팀장의 손이 결재판 위에서 멈췄다. “네가 안 쓰면 민수한테 쓰라고 할 수도 있어.”

민수는 프린터 옆에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하얘졌다. 그는 종이를 들고 있었지만, 그 종이의 숫자는 읽지 못한 상태였다. 태경은 그에게 결재판을 건네지 않았다.

“민수 씨는 전달만 했습니다. 원본을 본 적도 없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본 사람이 있으면 지금 이름을 쓰면 됩니다.”

복도 끝의 공기가 잠깐 멎었다. 팀장은 회의실 문을 열려다 말고 태경을 바라봤다. 화를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화가 서류의 빈칸을 채워 주지는 못했다.

“너, 오늘 왜 이래?”

그 질문에는 과거가 없었다. 그래서 태경은 과거를 답으로 쓰지 않았다.

“오늘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팀장은 한숨 대신 짧은 웃음을 냈다. “확인. 좋아. 그럼 네가 확인해. 열한 시 전에 거래가 멈추면 네가 거래처에 설명해.”

그는 결재판을 밀쳐 놓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며 ‘긴급 유동성 점검회의’라는 종이 표지가 흔들렸다. 유동성은 멈춰 있었고, 긴급한 것은 누가 먼저 잘리는가였다.

민수가 태경 곁으로 왔다. “제가 고객 재고표 뽑은 건 있는데요. 이건… 봐도 되는 겁니까?”

“업무용이면 봐야죠. 대신 원본 파일을 밖으로 보내지는 말고.”

민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프린터에서 나온 표를 건넸다. 윤성정밀의 주문은 내일 출고였다. 결품 예상은 세 시간 전에 올라온 표시였다. 첫 생의 기억 속에서는 그 고객이 오후에 선입금을 취소했고, 한림리빙은 그 취소를 핑계로 더 큰 현금 구멍을 숨겼다. 하지만 오늘의 주문서에는 취소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태경은 고객 담당자 이름 옆의 내선번호를 적었다. 기억은 통화가 될지 알려 주지 않았다. 다만 통화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만 알려 줬다.

“민수 씨, 이 재고표를 누가 수정했는지 로그 확인 가능합니까?”

“권한은 팀장님하고 생산관리 쪽만… 저는 보기만 됩니다.”

“그럼 보기만 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요. 대신 출력 시각은 메신저에 남겨요.”

민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출력물 오른쪽 위의 시각을 휴대전화로 찍었다. 사진을 누구에게 보내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방식을 고르고 있었다.

태경은 서류를 다시 펼쳤다. 수취 계좌 끝 네 자리와 잔액표의 계좌 끝 네 자리가 달랐다. 첫 생에는 그 차이를 오후까지 보지 못했다. 지금 보았다고 해서 돈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가 틀린 계좌를 정답으로 만들기 전에 멈출 수는 있었다.

그는 은행 대표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세 번 울렸다. 상담원은 담당자 연결을 위해 법인번호와 본인 확인을 요구했다. 태경은 회사 명의 전화도, 조회 권한도 없었다. 그는 그 사실을 적었다. ‘10:07, 조회 권한 없음. 공식 담당자 확인 필요.’

전화가 끊긴 뒤에도 화면에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빈칸은 아니었다.

회의실 안에서 팀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군가 “윤 대리가 막고 있다”고 말했다. 태경은 프린터가 멈춘 자리를 지나 자리에 돌아왔다. 고객에게 걸 전화를 누르기 전에, 그는 손실장부가 있을 법한 주머니를 한 번 만졌다. 작업복 주머니는 없었다. 장부도 없었다.

남은 것은 전표번호와, 아직 취소되지 않은 주문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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