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하지 않겠습니다
파산 공작령의 아이를 난로에서 꺼냈습니다 · 2026. 3. 26.
아침 업무판에는 에다의 이름이 여섯 번 적혀 있었다. 노아의 약, 수프, 밤 기록, 빨래, 회의 전달, 카시안의 식사까지였다. 에다는 지우개 대신 부엌칼의 평평한 면으로 자기 이름을 모두 긁었다. “노아를 사랑해요. 그래서 이 일을 혼자 하지는 않겠어요.”
긁힌 먹가루가 식탁 위로 떨어졌다.
가족 식당에는 어젯밤 수프 그릇과 빈 약병, 두 집 시험표가 한데 쌓여 있었다. 누가 판을 만들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에다는 글씨를 알아봤다. 카시안의 부관이 쓴 업무명, 하녀장이 붙인 시각, 카시안이 마지막에 채운 사람 이름. 여섯 칸 모두 에다였다.
카시안은 밤 연료 운반을 마치고 막 들어온 참이었다. 외투 어깨에 석탄 가루가 묻었고 눈 밑이 검었다. 그는 긁힌 판을 보고 첫마디로 말했다.
“지금은 비상시다.”
에다는 칼을 내려놓았다. 화가 날수록 손놀림은 차분해졌다.
“알고 있습니다, 카시안 리번 섭정님.”
풀네임이 나오자 카시안의 턱이 굳었다.
“그래서 더 바꿔야 해요. 비상이 끝날 때까지 미루면 제 수업은 없어지고 이 판만 남습니다.”
“수업은 보충하면 된다.”
“어제 빠진 북부법 수업 세 시각. 오늘 약 기록 두 시각, 빨래 한 시각, 회의 전달 한 시각. 보충할 날에도 노아는 약을 먹고 사람들은 수프를 먹겠죠.”
노아는 식탁 끝에 서서 긁힌 자기 이름을 보듯 에다의 빈칸을 바라봤다. 입을 열려 하자 에다가 먼저 말했다.
“네 잘못 아니야.”
노아는 입을 다물었다. 사과도 화해도 대신 하지 않았다.
세레나는 업무판을 떼어 식탁 위에 눕혔다.
“거절을 유효한 정보로 기록하겠습니다. 에다 씨가 맡지 않으면 중단되는 일부터 확인하죠.”
하녀장과 주방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귀족 가족의 약과 식사를 누가 정하느냐는 질문에 끼어들었다가 벌을 받은 기억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마리가 앞치마의 물기를 닦았다.
“약은 의원 보조가 시간만 배우면 됩니다. 수프는 한 그릇 따로 뜨는 일이고요. 빨래는 내 쪽인데, 피 묻은 붕대까지 들어오면 손이 모자랍니다.”
“그럼 누가 대체할 수 있죠?” 세레나가 물었다.
“지금 당장은 나. 그다음은 리사가 가르치는 경상병. 대신 세탁솥 열쇠는 내가 갖습니다.”
마리는 분배를 말하면서도 허리의 열쇠를 떼지 않았다. 에다는 그걸 지적하려다가 멈췄다. 오늘 자기 경계를 세우면서 다른 사람의 모순까지 해결하려 들면 다시 일이 늘었다.
“노아 약은 제가 하겠습니다.” 의원 보조가 말했다. “대신 밤 기록까지는 못 합니다.”
“밤 기록은 병사 교대에 붙인다.” 카시안이 말했다.
에다가 물었다.
“누가 읽고 틀린 칸을 고치죠?”
“내가.”
“밤 연료 운반도 했고 지금부터 회의도 하실 분이요?”
카시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세레나가 새 판을 가져왔다. 담당, 대체자, 시작 시각, 종료 시각, 휴식, 거절·중단. 여섯 칸이었다. 에다는 ‘담당’보다 ‘대체자’ 칸이 먼저 보였다.
“노아의 약.”
의원 보조가 담당에 이름을 썼다. 대체자는 의원. 야간 호출은 카시안. 에다의 이름은 없었다.
“수프.”
주방 담당과 배식 대체자가 따로 적혔다. 그릇 회수는 노아가 몸이 괜찮으면 직접, 아니면 문밖에 두기로 한 전날 조건이 그대로 옮겨졌다.
“빨래.”
마리가 담당, 경상병이 대체자였다. 휴식 칸에 전날 교육으로 늘어난 반 시각이 적혔다. 마리는 못 미더운 얼굴로 열쇠를 두드렸지만 이름을 지우지는 않았다.
“회의 전달.”
카시안은 에다를 봤다.
에다는 기다렸다. 그가 부탁으로 고칠지 시험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자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번 회의까지만 맡아 줘.”
“싫습니다.”
카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너다.”
“그래서 양식을 남겼습니다. 읽는 사람도 정하세요.”
하녀장이 손을 들었다. 주민 대표에게 전달하는 일은 자기 조카가 할 수 있다고 했다. 글을 읽는 속도는 느리지만 마을 길을 알고 있었다. 에다는 조카가 틀릴 때 고칠 사람으로 하녀장을 대체자 칸에 적었다.
“카시안의 식사.” 세레나가 마지막을 읽었다.
잠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에다가 피식 웃었다.
“그건 업무입니까?”
카시안은 마른 얼굴로 말했다.
“내가 먹는다.”
“정확합니다.”
업무판에서 여섯 번째 줄이 통째로 지워졌다. 카시안의 식사는 다른 사람의 돌봄 의무가 아니라 그의 자기 관리가 됐다.
노아가 의자 위에 올라가 새 판 아래에 작은 칸을 그렸다.
“이건요.”
“무슨 칸이지?” 카시안이 물었다.
“쉬는 사람.”
“휴식 칸이 있어.”
“그건 몇 시부터 몇 시까지잖아요. 쉬는 사람은 부르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에다는 그 칸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오전 수업 세 시각. 마리는 잠시 망설이다 전날 돌려받아야 할 반 시각을 적었다. 대장장이 이름도 들어갔다.
카시안은 판을 오래 보았다.
“비상 호출은?”
에다가 답했다.
“대체자가 둘 다 없고, 안 부르면 사람이 다치는 경우. 부른 뒤에는 누가 왜 불렀는지 적고요.”
“조건이 많군.”
“그동안 조건 없이 불렀으니까요.”
카시안은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밤 기록 담당 칸에 자기 이름을 썼다. 시작은 해 질 무렵, 종료는 새벽 첫 교대종. 대체자는 부관 오르센. 휴식은 그 뒤 세 시각.
“이걸로 됐나?”
에다는 판을 확인했다.
“오늘 한 번 했다고 끝난 건 아닙니다.”
“안다.”
그 짧은 대답에는 사과도 애틋함도 없었다. 그러나 카시안은 자기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오전 수업을 위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에다의 책상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교본 사이에 노아의 약 시간표가 끼어 있었다. 에다는 그것을 업무판으로 가져다 놓고 북부법 책을 펼쳤다.
세 시각 동안 두 번 문밖 발소리가 멈췄다. 한 번은 의원 보조가 약병을 찾다가 돌아갔고, 한 번은 하녀장 조카가 회의 문구를 물으러 왔다가 양식을 다시 읽었다.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에다는 첫 장을 다 읽지 못했다. 머리가 자꾸 노아 방으로 갔다. 거절했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걱정과 담당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해 질 무렵, 카시안은 업무판 사본을 들고 노아의 임시 침실로 갔다. 에다는 교대 인수인계를 보려고 따라갔지만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노아는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카시안이 문을 닫자 그의 손이 굳었다.
“잠그지 않는다.” 카시안이 말했다.
“열쇠는요?”
카시안은 문고리에 열쇠를 꽂아 둔 채 손을 뗐다. 안에서도 돌릴 수 있는 방향이었다.
“약은 의원 보조가 맡았고, 나는 체온과 외곽 온도판을 확인한다. 두 시각 뒤 오르센이 한 번 들어온다.”
“왜요?”
“내 기록이 맞는지 보고, 내가 졸면 깨우려고.”
“삼촌이 안 된다고 하면요?”
카시안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그래도 들어온다.”
노아는 손가락으로 침대 난간을 두 번 두드렸다.
톡, 톡.
“이건 멈추라는 거예요.”
“무엇을?”
“약도, 질문도, 창문 보는 것도요. 제가 두 번 하면 먼저 멈추고 왜 그런지 물어요.”
카시안은 반사적으로 위험한 상황은 예외라고 말하려 했다. 세레나가 업무판의 거절·중단 칸을 가리켰다.
“즉시 생명 위험이면 멈춘 뒤 두 번째 사람을 부릅니다. 혼자 계속하지 않고요.”
노아가 다시 두 번 두드렸다. 카시안은 말을 멈췄다.
“지금은 왜?” 그가 물었다.
“시험했어요.”
카시안은 화를 내지 않았다. 기록판에 ‘신호 시험, 중단함’이라고 적었다.
밤이 깊자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다. 카시안은 한 번씩 일어나 온도 표식을 보고, 돌아와 시작·종료 시각을 썼다. 노아가 잠들지 못하면 말을 시키려 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연료 운반 장갑의 찢어진 솔기만 꿰맸다.
에다는 복도 끝에서 한 번 방을 보았다. 문은 열려 있었고 열쇠는 문고리에 꽂혀 있었다. 노아의 손은 이불 밖에 나와 있었지만 화로선에는 닿지 않았다.
자정 뒤 외곽 온도가 떨어졌다. 카시안은 지도를 들고 나가려다가 오르센을 먼저 불렀다. 둘이 함께 기록을 확인한 뒤 카시안은 장작 운반대를 깨웠다. 노아 방을 잠그지 않았고 에다를 부르지도 않았다.
새벽 첫 교대종이 울릴 때 오르센이 들어왔다. 카시안은 잠든 노아를 깨우지 않고 약병 수, 체온, 두 집 온도, 두 번 두드림 신호를 읽어 줬다. 문고리 열쇠도 그대로 넘겼다.
업무판의 첫 야간 칸이 끝났다. 에다의 이름은 그 칸 어디에도 없었다.
카시안은 식당으로 가 남은 수프를 스스로 데웠다. 에다는 수업 방에서 아직 자고 있었다. 노아는 열린 문 안 침대에서 숨을 고르게 쉬었다.
해가 뜬 뒤 에다가 수업 방 문을 열었을 때 복도에는 호출 쪽지가 한 장도 없었다. 책상 모래시계의 모래는 세 번 모두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세 시각을 온전히 쉰 건 아니었다. 한 시각은 읽었고, 한 시각은 꾸벅 졸았고, 마지막에는 노아가 약을 먹었는지 궁금해 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래도 누구도 그 궁금함을 담당 업무로 바꾸지 않았다.
가족 식당의 업무판에는 밤사이 고친 흔적이 있었다. 오르센은 외곽 온도 칸의 숫자 하나를 두 줄로 긋고 옆에 자기 이름을 썼다. 의원 보조는 노아의 약 시각에 도장을 남겼다. 카시안의 야간 칸에는 종료 시각과 함께 ‘두 번 두드림 1회, 즉시 중단’이 적혀 있었다.
에다는 카시안의 식사 줄을 찾았다. 줄 자체가 없었다. 대신 싱크대에는 그가 먹고 씻어 엎어 둔 수프 그릇이 있었다.
“밤새 아무 일 없었어요?”
세레나가 대답했다.
“일은 있었습니다. 에다 씨 담당이 아니었을 뿐이에요.”
노아가 열린 문 안에서 손가락을 두 번 두드렸다. 이번에는 멈추라는 뜻이 아니라 카시안이 약속을 기억하는지 묻는 신호였다. 카시안은 바로 말을 멈추고 노아를 보았다.
“왜 그런지 물어도 될까?”
“그냥 해 봤어요.”
“기록할까?”
노아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저었다. 카시안은 펜을 내려놓았다.
에다는 업무판의 ‘쉬는 사람’ 칸에서 자기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다음 수업 시각을 한 줄 더 붙였다. 그 아래 야간 교대 빈칸은 카시안 이름이 아니라 다음 담당자가 고를 수 있도록 그대로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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