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은하는 봉인 사진을 프로젝터에 띄웠다
포기한 선택을 다시 여는 장학생 · 2026.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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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하는 봉인 사진을 프로젝터에 띄웠다.
“이게 이번 주 실습 성과입니다.”
최하위 분기반 열두 명이 그 사진을 봤다. 지하 금속문, 자물쇠 세 개, 자치회 규격 봉인, 시각 열여덟 시 오십사 분.
미래는 뒷줄에서 그 화면을 보면서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교수가 성과라고 부르는 순간, 그건 점수가 붙는다는 뜻이었다. 점수가 붙으면 조건이 따라온다.
“열지 않은 것이 성과입니까.” 앞줄에서 누가 물었다.
“열지 않은 이유가 기록에 있으면 성과입니다.” 마은하가 화면을 넘겼다.
다음 화면에 미래의 장부가 있었다. 봉인 시각, 가람의 진술 두 문장, 도윤의 고지 지연 1건까지 그대로였다.
미래는 자기 장부에 그 항목이 남아 있는 걸 봤다. 지우자고 한 사람이 없었다.
“분기 7조.”
넷이 일어섰다.
“영구 분기조 자격을 제안합니다.”
교실이 움직였다. 영구 분기조는 학년 단위로 두세 개만 승인된다. 최하위반에서 나온 적은 없었다.
“조건이 있습니까.” 미래가 물었다.
“있습니다. 영구 분기조는 실습 배정에서 우선순위를 받습니다. 대신 사고 발생 시 조 전체가 책임 주체가 됩니다.” 마은하가 말했다. “그리고 계약서를 학생들이 씁니다.”
“학원 서식이 아니고요?”
“서식은 있습니다. 학생들이 조항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미래는 그 문장에서 어제 부속서를 떠올렸다. 학원 서식에는 정의 없는 대상을 영구 귀속시키는 문장이 있었다.
“교수님. 장학 규정 제칠장 제사항, 이 계약에 적용됩니까.”
마은하가 잠깐 멈췄다.
“적용됩니다.”
“그럼 저희가 실습에서 만드는 잔향이 전부 학원 공동 자산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조항 삭제 신청은 심사 중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마은하가 말했다. “심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 계약을 쓰면, 학생들은 그 조항 아래에서 서명하는 겁니다.”
미래는 그 대답의 구조를 봤다. 교수는 지금 불리한 사실을 먼저 말했다. 어제까지 이 사람은 말하지 않는 쪽이었다.
“기다릴 수 있습니까.”
“기다리면 자격 제안이 다음 학기로 갑니다. 다음 학기에는 제가 담당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게 진짜 조건이었다. 미래는 그걸 알아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넷이 남았다. 미래는 결정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다들 알고 정하는 거예요? 영구는 반 이동이 안 돼요.”
“무슨 뜻이야.” 도윤이 물었다.
“지금 유서린 학생은 수석이에요. 다음 학기에 상위반으로 올라갈 수 있어요.” 미래가 서린을 봤다. “영구 분기조에 서명하면 못 올라가요.”
서린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나 어제 결투에서 수석 자격 걸었어.”
“이겼잖아요.”
“이겼지. 근데 걸어 봤으니까 알아.” 서린이 말했다. “수석은 내가 지키고 싶은 게 아니야.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
“가람 학생은요?”
“나는 올라갈 데가 없어.” 가람이 말했다. “근데 그거랑 별개로 여기 있고 싶어.”
미래는 자기 차례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식을 폈다.
계약서 작성은 오후 세 시부터였다.
학원 서식은 열한 조였다. 미래는 열두 조부터 쓰기 시작했다.
“제십이조. 조원은 각자 즉시 거부권을 한 번 갖는다. 다른 조원이 멈추라고 하면 능력 사용을 그 자리에서 중단한다.”
“그건 임시 계약에 있었어요.” 가람이 말했다.
“임시에는 있었고 이건 영구예요.” 미래가 말했다. “영구에서는 위반 비용을 써야 해요.”
그녀는 다음 줄을 썼다.
“위반 시 조 전원의 장학 지원과 순위가 동결된다.”
“전원이요?” 서린이 물었다.
“전원이요.”
“위반한 사람만 하면 되는데.”
“그러면 한 사람을 버리고 나머지가 남아요.” 미래는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전원이면 우리가 서로를 감시해요. 그게 목적이에요.”
서린이 그 조항을 세 번 읽었다. 그리고 자기 조항을 하나 냈다.
“제십사조. 조원의 기여 항목은 다른 조원의 승패에 걸지 않는다.”
미래는 그 문장의 출처를 알았다. 어제 결투에서 서린이 재대결을 포기한 이유였다.
“그거 학사위원회 안건이랑 같은 내용이에요.”
“안건은 통과 안 될 수도 있어. 계약에는 우리가 넣을 수 있어.”
가람이 손바닥을 책상에 붙였다. 자기 조항을 말할 때 나오는 동작이었다.
“제십오조. 확인 안 된 감각으로도 거부권을 쓸 수 있다.”
미래가 그 문장을 그대로 적었다. 그리고 물었다.
“가람 학생, 이거 학생한테 제일 불리해요. 확인 안 된 걸로 멈추면 책임은 학생이 져요.”
“알아. 그래서 뒤에 한 줄 더.” 가람이 말했다. “거부권 행사자는 결과 손실의 책임을 함께 기록한다.”
미래는 그 두 줄이 하나의 조항이라는 걸 이해했다. 권한과 책임이 같은 줄에 있었다.
도윤은 세 번째로 말했다.
“나도 하나.”
“말하세요.”
“제십육조. 조원은 조 밖에서 받은 제안을 조에 알린다.” 도윤이 말했다. “받았을 때 알려. 거절한 다음이 아니고.”
미래의 손이 멈췄다. 그 조항은 도윤 자신에게 가장 불리했다. 그리고 미래에게도 불리했다.
“기한은요?”
“이십사 시간.”
“왜 그 조항을 학생이 내요?”
“내가 지난주에 거절한 다음에 말했어.” 도윤이 말했다. “그때는 내가 잘한 것 같았어. 근데 어제 열쇠 색깔을 나만 알고 있었어. 두 번째부터는 쉬워졌어.”
미래는 그 문장을 들으면서 자기 가방 안쪽의 종이를 생각했다. 아버지 회사 인장과 두 목록이 적힌 종이였다.
이십사 시간. 그 조항이 성립하면 미래는 오늘 안에 말해야 한다.
정확히는 아니었다. 조항은 조 밖에서 받은 제안을 말하라고 한다. 미래가 가진 건 제안이 아니었다. 사 년 전 계약서였고, 부속서 인장이었다.
제안이 아니니까 조항 대상이 아니다. 미래는 그 논리를 삼 초 안에 만들었다.
만들고 나서 그 논리가 자기가 평생 싫어했던 종류라는 걸 알았다. 문구의 빈틈으로 빠져나가는 것.
“조항 넣을게요.” 미래가 말했다.
넣고 나서 그녀는 자기 차례에 아무 조항도 내지 않았다. 서린이 그걸 봤다.
“박미래, 네 조항은?”
“없어요.”
“열한 조까지 남이 쓴 걸 검수하고, 열두 조랑 열세 조는 네가 쓰고, 네 조항은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미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대답 대신 서명란을 폈다.
“지금은 없어요. 나중에 추가할게요.”
“나중이 언제야.”
“모르겠어요.” 미래가 정직하게 말했다. “근데 제 조항이 하나 필요하다는 건 알아요.”
가람이 그때 말했다. “그건 엇박 있어.”
미래는 그를 봤다. 가람은 지적하려고 말한 게 아니었다. 알려 주려고 말한 것이었다.
“알아요.” 미래가 말했다. “지금은 그게 제 최선이에요.”
서린은 그 대답을 받았다. 어제 걸었던 조건이 아직 유효했다.
서명은 네 사람이 같은 지점에 겹쳐서 했다. 학원 서식의 공동 서명 방식이었다. 네 개의 이름이 한 칸 안에서 겹친다.
미래가 마지막이었다.
서명 순서는 미래가 정했다. 도윤을 첫 번째로 두지 않았다. 첫 번째가 가람이었다.
“왜 나야?” 가람이 물었다.
“학생 조항이 제일 불리해서요.” 미래가 말했다. “제일 불리한 사람이 먼저 쓰면, 나머지가 못 물러나요.”
가람이 서명했다. 손바닥을 책상에 붙이고 나서 썼다.
서린이 두 번째, 도윤이 세 번째였다.
펜을 뗐을 때 그 지점에서 빛이 났다.
아주 약했다. 형광도 반사도 아니었다. 네 갈래로 갈라진 선이 잉크 위에 얇게 남았고, 십 초쯤 뒤에 사라졌다.
“봤어요?” 가람이 물었다.
“봤어요.” 미래가 이미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거 뭐예요?”
마은하가 계약서를 확인했다.
“계약 마법의 안정 효과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조건에 동의하면 나타납니다.” 그녀가 말했다. “흔한 현상입니다.”
미래는 그 대답이 나오는 속도를 봤다. 어제 나침반 때 이 사람은 모른다고 했다. 오늘은 즉시 대답했다.
즉시 대답하는 건 두 가지다. 진짜 아는 것과, 준비해 둔 것.
“흔한데 저는 처음 봤어요.” 미래가 말했다.
“공동 서명이 흔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그 대답을 적었다. 흔한 현상, 흔하지 않은 조건. 두 문장이 같이 있으면 나중에 다시 볼 이유가 된다.
계약 성립 시각은 열여섯 시 사십칠 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에 지하에서 소리가 왔다.
가람이 먼저 일어섰다. “아래에서 뭐 났어.”
넷이 계단으로 갔다. 지하 2층, 지도에 없는 복도, 봉인된 문 앞.
봉인은 그대로였다.
문 옆 벽에 계기판이 하나 있었다. 어제는 없던 게 아니라, 어제는 꺼져 있었다.
지금 켜져 있었고, 숫자가 표시돼 있었다.
13
미래가 그 숫자를 사진으로 찍었다. 찍으면서 손이 흔들려서 두 번 찍었다.
계기판에는 단위가 없었다. 숫자만 있었다.
“열세 번째 종이랑 같은 숫자예요.” 미래가 말했다.
“같은 숫자인 게 뜻이 있는지는 모르지.” 서린이 말했다.
“몰라요. 근데 오늘 열여섯 시 사십칠 분에 켜졌어요. 우리 계약 성립 시각이에요.”
가람이 그 문장을 듣고 문에 귀를 붙였다.
“합주가 달라졌어.”
“어떻게.”
“어제는 한 박자 늦었어. 지금은 안 늦어.” 가람이 물러섰다. “우리랑 같이 가고 있어.”
그리고 문 안쪽에서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이었다. 급하지 않았다.
가람이 그 간격을 들었다.
“이거 서린이 칼집 두드리는 박자야.”
서린이 자기 칼집을 봤다. 그녀는 지금 두드리지 않았다.
미래는 그 두드림을 녹음했다. 단말을 들고 문 앞에 십오 초 서 있었다.
녹음을 끝내고 나서 그녀는 조 장부를 폈다. 오늘 항목이 다섯이었다.
영구 분기조 계약 성립. 조항 십이에서 십육. 네 갈래 표식 확인. 계기판 13 점등. 문 안쪽 세 번 두드림.
여섯 번째 줄을 쓸 수 있었다. 조원 박미래의 미고지 항목.
미래는 그 줄을 쓰지 않았다. 대신 장부를 닫고, 가방 안쪽의 종이를 한 번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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