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판단
포기한 선택을 다시 여는 장학생 · 2026. 3. 3.
서린은 출발선에서 미로를 보지 않고 자기 손을 봤다.
원장이 보낸 상자는 생활관 책상에 그대로 있었다. 방향 보정 장구, 후계자용, 사용 기록 비공개. 세 줄짜리 쪽지도 함께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판단을 위해 쓰라고 적혀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판단. 원장은 그 문장을 열여섯 살 때부터 서린에게 썼다. 처음에는 칭찬이었고, 지금은 규격이었다.
장구를 쓰면 미로는 쉬워진다. 그리고 오늘 수석은 장구의 수석이 된다. 기록에는 유서린이라고 적히고, 사용 기록은 비공개라서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다. 그게 가장 나쁜 부분이었다. 확인할 수 없는 승리는 나중에 취소할 수도 없다.
서린은 칼집만 들고 왔다.
“응시번호 일. 유서린. 보조 장비 신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태호가 서린의 손목과 허리를 확인했다. 확인하는 손이 두 번 멈췄다. 아마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기록에 무장구 완주 시도로 남깁니다. 실패해도 재시도는 없습니다.”
“압니다.”
“유서린 학생.” 태호가 초시계를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재시도가 없다는 조항은 학생에게 불리합니다. 신고만 하면 조항이 달라집니다.”
“신고하면 제 기록이 달라집니다.”
태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기록지 여백에 두 글자를 적었다. 서린은 그 두 글자를 읽지 못했지만, 여백에 적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어제 배웠다.
미로는 응시자의 첫 결정을 읽고 벽을 옮긴다. 오른쪽을 고르면 오른쪽이 막히고, 왼쪽을 고르면 왼쪽이 막힌다. 그래서 대부분은 고르지 않으려고 한다. 고르지 않은 채로 벽 사이를 더듬다가 시간을 잃는다.
서린의 방식은 반대였다.
출발 신호가 울렸을 때 그녀는 첫 갈림에서 멈추지 않았다.
“왼쪽 버립니다.”
소리 내어 말했다. 심판대에 들리도록, 그리고 자기 귀에 들리도록.
왼쪽 통로가 좁아졌다. 미로는 그녀가 버린 쪽을 막지 않는다. 고른 쪽을 막는다. 그러니 버린 쪽을 먼저 선언하면, 미로는 남은 쪽을 막게 되고, 막히는 순간 그 벽이 어디서 오는지 보인다.
벽이 밀려나오는 방향을 보고 서린은 오른쪽 두 걸음 뒤로 붙었다. 벽이 그녀가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두 번째 갈림. “가운데 버립니다.”
세 번째. “위 버립니다.”
선언은 미로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심판대를 향한 말이었다. 나중에 누가 이 완주를 의심하면, 서린이 무엇을 버렸는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버리는 데는 값이 있다. 결단 고정검은 정한 것을 붙잡아 주는 대신, 정한 것을 놓을 때 값을 받는다. 세 번째 선언 뒤에 오른쪽 손목 안쪽이 시큰했다. 네 번째에서는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서린은 통증을 계산에 넣었다. 열두 번까지는 견딜 수 있다. 미로 구간은 아홉 개다. 여유 세 번. 여유가 세 번이면 실수 한 번은 가능하고, 두 번은 안 된다.
여섯 번째 구간에서 벽이 예상보다 빠르게 왔다. 서린은 이미 선언한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바꾸면 값이 두 배가 되고, 값이 두 배가 되면 아홉 번째까지 못 간다. 그녀는 어깨로 벽을 스치며 지나갔다. 제복 어깨가 찢어졌다.
관중석에서 소리가 났다. 서린은 그 소리를 자기 이름으로 듣지 않았다. 관중은 무장구 완주가 뭔지 모른다. 알면 지금이 아니라 아홉 번째에서 소리를 낼 것이다.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는 계산대로 갔다. 두 번 선언하고 두 번 값을 냈다. 손목에서 시작한 통증이 이제 목 뒤까지 왔다. 열 번, 열한 번.
여덟 번째 구간을 지나면서 서린은 자기 왼쪽 다리가 계산보다 느리게 따라오는 걸 알았다. 값은 손목부터 올라오지만 결국 다리에서 걷힌다. 후계자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문장에는 다리 이야기가 없었다.
아홉 번째 구간. 벽 넷이 동시에 움직였다.
“전부 버립니다.”
말하고 나서 서린은 자기 문장이 문법적으로 어색하다는 걸 알았다. 판단이 흔들릴 때 문장이 오히려 딱딱해지는 자기 습관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고칠 수는 없었다.
네 방향을 다 버리면 남는 건 위와 아래다. 미로는 수평으로만 벽을 옮긴다. 서린은 칼집으로 바닥 격자를 두 번 두드려 빈 칸을 찾고, 그 칸을 밟고 아래로 반 층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벽 넷이 서로를 막았다.
결승선.
“완주. 일 분 사십사 초. 무장구.” 태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길었다. “수석 점수 확정입니다.”
“기록 문구에 무장구를 넣어 주십시오.”
“이미 넣었습니다.” 태호가 초시계를 멈췄다. “학생이 요구하기 전에 넣었습니다.”
서린은 점수판을 보지 않았다. 칼집을 들어 안쪽을 봤다.
금이 있었다. 어제까지 두 칸이었고, 오늘 세 칸이었다.
칼집 안쪽의 금은 규정에도, 정비 지침에도 없는 항목이다. 서린은 그것이 과사용 손상일 거라고 정리해 두었다. 정리해 둔 문장을 다시 읽으면 늘 한 군데가 비어 있었지만, 비어 있는 칸을 오늘 채울 필요는 없었다.
오늘 아홉 번 선언하고 열한 번 값을 냈는데, 금은 한 칸만 늘었다. 숫자가 맞지 않았다. 서린은 그 불일치를 기억해 두고 칼집을 닫았다.
그때 미로 밖에서 소리가 났다.
“비켜 주세요! 지나갈게요!” 누군가 소리쳤다.
한도윤이 사람을 업고 있었다.
서린은 상황을 세 초 안에 읽었다. 미로 외곽 구간에서 탈락한 응시자가 벽에 끼였고, 안전 인원은 반대편에서 오고 있었고, 한도윤은 자기 구간을 포기한 상태였다. 왼손에는 반쯤 채워진 잠금쇠가 그대로 있었다. 능력을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제 재현실에서 그는 종료 신호에 일 초 늦었다. 오늘은 아예 열지 않았다. 서린은 그 차이를 성장으로 읽지 않았다. 봉인된 손으로는 누구나 참을 수 있다.
안 쓰고 사람을 옮기는 건 느리다. 느리면 순위를 잃는다. 그는 순위를 잃은 상태로 지나갔다.
“응시번호 열둘. 구간 미완주.” 심판이 적었다. “탈락 처리.”
“구조 건은요.” 도윤이 물었다. 숨이 고르지 않았다. 업고 온 애의 다리에서 피가 났고, 도윤의 왼손은 잠긴 채였다.
“기록하겠습니다.”
“점수 말고 기록만 남겨 주세요.” 도윤은 그 말을 먼저 했다. 점수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고 온 얼굴이었다.
“구조는 감점 사유 아닙니다. 그렇다고 점수도 아닙니다.” 심판이 말했다.
심판이 기록지를 넘겼다. 그리고 서린의 이름 아래 칸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서린은 그 손을 봤다.
“지금 뭘 적으십니까.”
“수석 완주 중 외곽 구조 발생. 같은 항목에 묶어 적습니다.”
“분리하십시오.”
심판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제 완주는 제 것이고, 저 사람 구조는 저 사람 것입니다.” 서린은 자기 점수판을 가리켰다. “합쳐 적으면 제 기록에 남의 선행이 붙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 기록에는 제 순위가 붙습니다. 둘 다 값이 싸집니다.”
“…행정상 한 칸입니다.”
“칸을 만드십시오.” 서린이 말했다. “안 만들면 이의 신청하겠습니다.”
“유서린 학생, 본인 점수에는 유리한 처리입니다. 알고 반대하십니까.”
“유리한 게 정확한 것보다 앞서면, 다음에 제 점수도 누가 그렇게 만질 겁니다.”
태호가 뒤에서 기록지를 받아 갔다. 여백에 줄을 하나 그어 칸을 나눴다. 위 칸에 유서린, 무장구 완주, 일 분 사십사 초. 아래 칸에 한도윤, 외곽 구조 일 건, 구간 미완주.
도윤은 업고 온 애를 안전 인원에게 넘긴 뒤 그 기록지를 봤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하지 마.” 서린이 잘랐다.
“그럼 뭐라고 해야 되는데.”
“아무것도. 나는 네 편을 든 게 아니야. 기록이 틀린 걸 고친 거야.”
도윤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질문을 했다.
“근데 넌 왜 장구 안 썼어?”
서린은 그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는 대답이 짧아진다.
“내 판단이 아니게 되니까.”
“…그렇구나.” 도윤이 자기 기록 칸을 봤다. “나는 어제 남의 판단으로 이겼는데.”
“그것도 아니야.” 서린이 말했다. “너는 남의 판단을 쓴 게 아니라 남의 판단을 지웠어. 둘은 다른 죄야.”
도윤의 손이 왼쪽 장갑 끝으로 갔다가 멈췄다.
서린은 그 말을 인정으로 받지 않았다. 인정처럼 들리는 자기 비하는 다음번에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의 말투다.
그녀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결승 평가 신청서. 이름 칸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상대 칸도 채워져 있었다.
한도윤.
“내일 오후. 나랑 붙어.”
“내가 지금 조건부인 건 알지.” 도윤이 신청서를 집어 들었다.
“알아. 그래서 조건이 하나 더 있어.” 서린은 신청서를 그의 기록지 위에 겹쳐 놓았다. “다음엔 내 거절을 이길 생각부터 버려. 이기려고 하지 말고, 못 이기는 걸로 계획을 세워.”
“그게 조건이야?” 도윤이 되물었다.
“그게 시합 조건이야.” 그녀가 신청서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못 지키면 네가 이겨도 내가 기록에 이의를 낼 거야.”
서린은 돌아섰다. 어깨가 찢어진 제복이 걸음마다 벌어졌다.
뒤에서 도윤이 한 번 더 불렀다.
“유서린.”
그녀는 멈췄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대개 부탁을 하려는 사람이다.
“네 완주, 내 기록에 적어도 돼?”
“왜 네 기록에 적어.”
“내가 오늘 뭘 봤는지 남기려고. 장구 안 쓰고 이긴 거.” 도윤은 자기 기록지를 들어 보였다. “안 적으면 내가 나중에 이걸 능력 상성 문제였다고 기억할 것 같아서.”
서린은 삼 초 동안 그 제안을 검토했다. 함정도, 아첨도 아니었다. 자기 기억을 미리 고정하려는 사람의 요청이었다.
“적어. 대신 문구는 내가 정할게.”
“말해.” 도윤이 펜을 꺼냈다.
“유서린, 무장구 완주, 수석. 그 뒤에 아무 말도 붙이지 마.”
생활관에 돌아와서 그녀는 원장의 상자를 열지 않은 채 책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쪽지만 꺼내 서랍에 넣었다. 버리지는 않았다. 버렸다고 선언하지 않은 것은 아직 버린 게 아니다.
그리고 칼집 안쪽을 다시 봤다. 세 칸.
내일 결승에서 몇 번 버려야 할지 계산했고, 계산이 열둘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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