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송주혁의 이름은 회색실 사건표에서 가장 먼저 굵어졌다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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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주혁의 이름은 회색실 사건표에서 가장 먼저 굵어졌다. 밤새 확보한 자료를 조합하면 그럴듯했다. 고가 임상약의 창고 출입 권한, 배송지 승인 계정, 문세림의 사망 시각과 겹치는 냉장 구역 접근. 팀은 아직 범인이라고 쓰지 않았지만, ‘약품을 빼돌리기 위해 허위 배송을 만들고 약사를 막아섰을 가능성’이라는 첫 가설을 실행 가능한 용의선으로 올렸다.

송주혁은 그 문장을 읽고도 바로 화내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와 출입증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제가 창고를 나간 시각부터 확인하세요.”

민우가 휴대전화를 받으려 하자 송주혁이 손을 얹었다.

“복제는 허용합니다. 단, 제가 먼저 무엇을 제공하는지 기록해 주세요. 또 제 동의 없이 다른 자료와 묶지 마십시오.”

서진은 그 요구를 기록했다. 오판 피해자가 사과보다 접근 제한과 자료 범위를 먼저 정하고 있었다. 팀이 그를 의심할 권한을 가졌다면, 그는 의심의 범위를 통제할 권리도 가져야 했다.

휴대전화의 블루투스 도킹 기록은 03:41부터 04:18까지 송주혁의 차량과 연결되어 있었다. 배송 완료 시각 04:03에 그는 창고를 떠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출입기록도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송주혁의 휴대전화가 창고 밖의 배송지에 있었다는 첫 가설은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민우가 말했다. “도킹 기록이 조작됐을 가능성은요?”

“그래서 다른 출처를 봅니다.” 서진이 답했다.

플랫폼에서 배송 완료 사진의 원본 파일이 도착했다. 사진의 카메라 일련번호는 박현우의 배송기기가 아니라 운영실에 놓인 테스트폰과 일치했다. 사진은 현관 앞에서 찍혔고, 메타데이터상 생성 시각은 04:03:17이었다. 송주혁은 운영실 테스트폰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사진을 찍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름은 사진 일련번호와 송주혁의 도킹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첫 가설은 송주혁이 자신의 휴대전화로 배송을 조작했다는 것이었지만, 사진은 다른 장치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운영실 테스트폰의 접근기록을 요청했다.

송주혁이 말했다. “테스트폰은 야간 담당자가 쓸 수 있습니다.”

“누가 썼는지 기록이 있습니까?”

“잠금번호를 공유하는 방식이라 이름은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진은 그 말을 수상함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록이 남지 않는 시스템은 송주혁의 책임이면서 동시에 그가 말한 위험의 근거였다. 고가 약품을 빼돌리기 위해 허위 배송을 만든 사람이라면, 자신이 통제하는 테스트폰을 이용할 수 있었다. 반대로 누구든 같은 장치를 쓸 수 있다면, 송주혁을 특정하는 고리는 약해졌다.

민우는 팀의 첫 가설을 다시 읽었다.

“송주혁이 약품을 훔치려 했다. 배송 사진을 위조했고, 문세림 씨를 냉장 구역에서 막아섰다.”

서진이 문장을 끊었다. “사진을 위조했다는 건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사진 파일의 일련번호가 운영실 테스트폰과 같다는 것만 확인됐습니다.”

“그럼 테스트폰을 쓴 사람이 누군지 찾으면 되죠.”

“그 전에 송주혁의 위치가 배송 사진과 맞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민우는 블루투스 도킹 기록을 보안팀에 다시 확인시켰다. 기록은 휴대전화가 차량과 연결된 시각을 뜻할 뿐, 사람이 차량 안에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차량은 창고 뒤편에 주차되어 있었고, 문세림의 사망이 발견된 냉장 구역과 가까웠다. 송주혁이 차량을 두고 걸어갔을 가능성은 남았지만, 그가 테스트폰을 들고 배송지로 이동했다는 고리는 없었다.

오후가 되자 플랫폼에서 테스트폰의 운영실 출입기록이 왔다. 03:58에 문이 열렸고, 04:06에 닫혔다. 출입자는 송주혁이 아니라 야간 관리 직원 윤혜진이었다. 윤혜진은 테스트폰으로 배송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고 했지만, 잠금번호를 알고 있었다.

송주혁은 그 자료를 보고 의자에서 몸을 뒤로 뺐다. 의심받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의심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제가 말한 통제 문제가 맞았죠.”

민우가 대꾸했다. “그렇다고 당신이 무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하지 않은 일까지 제 책임으로 쓰지 마십시오.”

서진은 그 요구를 그대로 적었다. 송주혁은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첫 가설의 문구와 자신의 접근 제한을 고치라고 요구했다. 오판 피해자의 발언권이 사건의 절차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문세림의 사망 시각에 대한 추가 분석도 도착했다. 저체온 상태가 창고 내부의 냉기만으로 생겼는지, 외부에서 옮겨진 뒤 냉장 구역에 놓였는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머리 뒤쪽 외상은 넘어짐으로 생길 수 있지만, 바퀴 자국과 함께 볼 때 이동 중 충돌 가능성도 있었다.

서진은 사건표의 ‘시체를 냉장 구역으로 옮김’이라는 문장을 지웠다. 대신 ‘사망 장소와 발견 장소의 관계 미확정’이라고 썼다. 첫 가설은 범인뿐 아니라 사건의 공간도 너무 빨리 정하고 있었다.

민우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틀렸다는 겁니까?”

“네. 적어도 처음 쓴 문장은 틀렸습니다.”

“정정하면 송주혁이 그 틈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 위험을 이유로 틀린 기록을 남길 수는 없습니다.”

서진은 송주혁에게 정정할 내용을 먼저 보여 주었다. ‘송주혁이 약품을 훔치기 위해 허위 배송을 만들고 문세림을 살해했다’는 가설은 폐기하고, ‘운영실 테스트폰과 배송 토큰의 생성 경로를 확인한다’는 질문으로 바꾼다는 내용이었다. 송주혁은 문장을 읽은 뒤 한 항목을 추가했다.

‘정정문에는 송주혁이 제공한 블루투스 도킹 기록이 가설 반증에 사용됐음을 명시한다.’

민우가 그 항목을 보며 말했다. “당신 이름을 빼면 안 됩니까?”

“제가 자료를 냈다는 사실을 빼면, 나중에 제가 말을 바꾼 것처럼 보일 겁니다.”

서진은 그 문장을 정정문에 넣었다. 오판의 책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자료를 제공한 사람의 공을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저녁, 팀은 운영실 테스트폰의 사진 목록을 복구했다. 배송 사진 전후로 세 장의 테스트 이미지가 있었고, 마지막 사진에는 냉장 약품 상자의 바코드가 찍혀 있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얼굴이 나오지 않았지만, 손목에 낡은 파란 밴드가 보였다. 송주혁은 그런 밴드를 차지 않았다. 윤혜진은 차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할 수 없었다.

서진은 손목 밴드를 용의선으로 올리지 않았다. 장면의 물성으로만 기록하고, 다른 영상과 비교하기로 했다. 첫 가설이 무너진 자리에는 곧장 새 범인을 넣지 않는 것이 이번 정정의 핵심이었다.

밤 아홉 시, 민우와 서진은 팀의 오판을 공식 기록에 올렸다. 정정문에는 첫 가설, 반증 자료, 폐기 시각, 송주혁에게 알린 시각이 순서대로 들어갔다. 민우는 서명란 앞에서 오래 멈췄다.

“내 이름으로 나갑니다.”

“처음 가설도 당신 이름으로 올렸으니까요.”

“당신도 서명해야 합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능력 출력 ‘빈집’을 바탕으로 송주혁을 의심한 기록을 숨기지 않았다. 다만 그 단어가 주어·시점·진위를 주지 못했다는 설명과, 실제 반증은 블루투스 도킹 기록과 사진 일련번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함께 적었다.

송주혁은 정정문을 받은 뒤 접근권한을 전부 회복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운영실 테스트폰과 냉장구역 출입기록에 대한 자신의 접근을 제한하고, 외부 검토자가 그 자료를 직접 보게 해 달라고 했다.

“제가 다시 보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서진은 그 말을 기록했다. 오판 피해자는 사과보다 감시의 규칙을 원하고 있었다.

정정문이 게시된 뒤, 사건표의 굵은 이름은 사라졌다. 대신 두 개의 질문이 남았다. 누가 운영실 테스트폰으로 배송 완료 사진을 만들었는가. 문세림은 실제로 어디에서 외상을 입었는가.

서진은 마지막으로 빈집이라는 단어가 적힌 능력 기록을 별도 봉투에 넣었다. 단어가 첫 가설을 밀어 올렸고, 독립 기록이 그 가설을 무너뜨렸다. 그 과정 전체를 남겨야 다음 오독도 정정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송주혁은 외부 검토자 앞에서 자신의 자료 접근을 제한하는 확인서에 서명했다. 그는 명예를 회복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회색실이 운영실 테스트폰을 증거 보관함으로 옮기고 회사 관리자가 원격으로 지우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민우가 말했다. “당신이 관리자인데, 왜 권한을 내려놓습니까?”

“관리자라서요. 제가 지우지 않았다는 걸 제가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그 말은 서진의 수첩에 오래 남았다. 송주혁은 무죄를 선언받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통제권이 의심의 근거가 되지 않도록 통제권을 줄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행동도 결백의 증거로 쓰지는 않았다.

운영실 테스트폰의 마지막 세 장 사진은 별도 해시로 보관됐다. 손목의 파란 밴드는 확대하지 않고 원본 영상과 대조할 목록에 넣었다. 윤혜진은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03:58부터 04:06까지 운영실에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녀의 진술도 기록되고, 반증 가능한 질문으로 남았다.

서진은 공개 정정문을 읽으며 문장 하나를 더 고쳤다. ‘송주혁의 범행 가설이 틀렸다’가 아니라 ‘송주혁을 특정할 독립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해당 가설을 폐기했다’고 바꾸었다. 누군가의 무죄를 감정으로 선언하지 않고, 증거의 상태로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민우는 그 정정문에 서명한 뒤 자신의 보고서 첫 페이지를 접어 버리지 않았다. 그는 폐기된 가설도 원본 기록함에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서진은 그 말이 이전의 민우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관계 회복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보고서에 반대 가설을 적을 수 있는 상태가 한 단계 올라갔다.

밤이 되자 송주혁에게 익명 계정에서 메시지가 왔다. ‘당신이 자료를 넘겼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그 메시지를 회색실에 전달할지 고민하다가, 먼저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원본 보존을 눌렀다. 그리고 서진에게 연락해 “제가 보관할지, 기관에 넘길지 선택지를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서진은 그가 메시지를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도 협조의 증거로 과장하지 않았다. 대신 보존 담당자와 보호 절차를 적어 보냈다. 오판 피해자의 신뢰는 사과 한 번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자료를 누가 어떤 권한으로 보관하는지 함께 결정하는 과정에서 다시 만들어졌다.

사건표에는 새로운 문장이 남았다.

‘첫 가설은 폐기되었다. 폐기 이유는 송주혁의 결백 선언이 아니라, 도킹 기록과 테스트폰 일련번호의 독립 반증이다.’

서진은 그 문장을 저장하고, 운영실 사진의 손목 밴드에 커서를 올렸다. 아직 누군지 몰랐다. 다만 이제 팀은 그 빈칸을 범인의 이름으로 채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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