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홉 시, 서진은 형광 도료가 묻은 케이스를 분석실의 흰 천 위에 올려놓았다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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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홉 시, 서진은 형광 도료가 묻은 케이스를 분석실의 흰 천 위에 올려놓았다. 케이스는 낡았고 손잡이에는 손톱으로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 자국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퀴 안쪽에 남은 파란 가루였다. 처음 현장을 봤을 때 그녀는 그 가루를 계단 난간에서 떨어진 것으로 적었다. 그 문장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아침의 첫 한 시간이 들었다.
분석 담당자는 현미경 화면을 서진 쪽으로 돌렸다.
“같은 파란색처럼 보이지만 수지가 달라요. 아래층은 새로 칠한 도료고, 위에 눌린 입자는 오래된 분말입니다.”
“채취나 운반 중 섞였을 가능성은요?”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결과만으로 이동 순서를 확정하지 않겠습니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결과표의 확정 칸을 가리고, 대안 칸을 열었다. 채취 봉투가 흔들렸을 가능성, 사건 당일 케이스가 다른 층을 지나갔을 가능성, 누군가 현장에서 새 도료를 덧칠했을 가능성. 세 가지를 적고 각각 무엇이 나오면 틀린 설명인지 옆에 붙였다.
민우가 뒤에서 종이를 들여다봤다.
“이렇게까지 약하게 쓰면 보고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약한 게 아니라 나중에 틀렸을 때 어디서 틀렸는지 보이는 겁니다.”
분석 담당자는 맹검 번호가 붙은 두 번째 표를 내밀었다. 혈액 단백질은 새 도료 아래가 아니라 위쪽 입자 사이에 끼어 있었다. 케이스가 피해자와 접촉한 뒤 묻은 흔적이었다. 하지만 새 도료는 그보다 먼저 눌려 있었다.
서진은 사건 전날의 사진을 불러왔다. 바퀴에는 이미 파란 선이 있었지만, 계단 현장에서 찍힌 사진의 선은 안쪽으로 더 깊었다. 누군가 같은 경로를 두 번 사용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한 번은 도료를 묻히기 위해, 한 번은 사람을 옮기기 위해.
“시험과 실제 이동이 분리됩니다.”
그녀가 말하자 민우는 바로 백상호 이름을 적으려 했다. 서진이 펜 끝을 눌렀다.
“아직 실행자는 아니에요. 경로가 사전에 사용됐다는 것과 그 사람이 사용했다는 건 다른 문장입니다.”
민우는 펜을 내려놓았다. 표의 빈칸이 오히려 사건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열한 시가 되자 경민이 유지보수실에서 백업 장치를 들고 왔다. 메인 서버와 연결되지 않은 낡은 카운터였다. 비상키를 몇 번 돌렸는지만 남고, 정확한 시각이나 작업자의 이름은 남지 않는 장치였다. 경민은 케이스를 내려놓고 먼저 자신의 서명부터 확인했다.
“이 장치는 제가 관리했습니다. 기록 누락 책임도 제 쪽에 있습니다.”
“그럼 넘기지 않을 이유가 더 생긴 거죠.”
서진의 말에 경민이 고개를 들었다.
“숨기면 제 관리 소홀은 남지 않겠지만, 백상호가 접근한 기록도 같이 사라집니다. 사본을 두 군데에 만들죠.”
민우는 카운터의 숫자를 사진으로 찍고 모터 진동 로그와 대조했다. 사건 전날 오후, 숫자가 두 번 증가한 구간이 있었다. 업체 작업표에는 아무 일정도 없었다. 그 시간대에 출입한 사람은 백상호 한 명뿐이었다. 출입 기록만으로는 부족했지만, 정식 작업표에 없는 비상키 시험과 새 도료가 같은 날에 겹쳤다.
경민은 작업표의 빈 줄에 ‘미기재 시험 확인’이라고 적었다. 민우가 왜 자기 이름까지 쓰느냐고 묻자 경민은 장치 뒷면의 봉인을 가리켰다.
“누락된 기록은 누락시킨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관리했고,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어요.”
그 말 뒤에 서진은 자신이 처음 형광 가루를 낮게 평가한 문장도 출력했다. 민우가 말없이 그 종이를 보았다. 서진은 문장 아래에 정정 이유를 썼다. ‘새 도료의 선행 압착과 혈액 접촉 순서가 확인되어, 사건 후 우발 사용 가설을 폐기함.’
오후 회의에서 여름은 외부 편집자의 역할을 세 줄로 나눴다. 사전 파일을 받았는가. 피해 전 계획을 알았는가. 피해 후 편집을 실행했는가. 장 모의 결제와 로그는 세 번째 줄을 가리켰지만 첫 번째 줄에도 걸쳐 있었다. 두 번째 줄은 아직 비어 있었다.
“빈칸을 백상호의 진술로 메우면 안 됩니다.” 여름이 말했다. “그 사람이 거짓말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인식까지 자동으로 커지지 않아요.”
서진은 장 모의 메시지에서 ‘보안 테스트’라는 표현을 찾아냈다. 그 말은 백상호가 회사 내부 문서에서 쓰던 표현과 같았지만, 장 모가 그 문장을 보고 받았는지 아니면 스스로 골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수사팀은 결론 대신 전송 경로를 요청했다.
그때 다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발신자 이름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USB를 돌려주지.” 백상호의 목소리였다. “대신 네가 숨긴 아이 이름을 말해.”
다빈의 손가락이 굳었다. 경민이 통화 녹음 버튼을 누르려 하자 그녀가 손바닥을 들어 멈췄다. 서진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능력을 떠올렸다. 한 단어만 들으면 상대가 무엇을 숨기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단어는 언제나 대가를 남겼고, 그 대가를 누가 떠안을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USB가 정말 당신 손에 있다는 증명부터 보내요.” 다빈이 말했다. “사람 이름은 거래 대상이 아니에요.”
통화가 끊기고 십 분 뒤,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무인 보관함 번호와 봉인된 검은 케이스. 사진 구석에는 파란 삼각형이 찍힌 영수증이 놓여 있었다. 서진은 영수증을 확대하다가 손을 멈췄다. 고객번호 일부가 지난 결제 기록과 겹쳤다.
민우가 말했다.
“지금 가면 보관함을 열 수 있습니다.”
“열지 말고 위치를 보존해요.” 다빈이 답했다. “제가 고른 기관을 같이 부를 겁니다.”
경민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회색실이 증거를 독점하면 백상호가 거래의 주인을 바꿔 버릴 수 있었다. 다빈은 법률기관에 연락해 공동 봉인 절차를 요청했고, 민우는 보관함 앞의 출입 영상을 확보했다.
서진은 분석표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사건 전날의 시험은 확인되었다. 실행 주체는 백상호로 좁혀지지만, 동기와 역할은 별도 검증이 필요하다.’
그 순간 경민의 백업 장치 화면에 원격 접근 실패 기록이 떴다. 보관함의 전원이 두 번 흔들렸고, 접근 계정은 백상호 명의였다. 다빈은 USB를 보지 못한 채 봉인할 수 있는 첫 기회를 얻었다. 서진은 능력 사용 칸을 비워 둔 채, 반증표를 다음 줄로 넘겼다. 무인 보관함 앞에는 이미 관리 직원이 와 있었다. 경민은 관리코드를 요구하지 않고 카메라의 시야와 시간 표시가 함께 보이는 곳에 휴대전화를 세워 두었다. 민우가 봉인 테이프를 꺼내자 다빈이 먼저 말했다.
“테이프는 제가 확인할게요.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수사팀 표식을 붙이면, 나중에 그 표식 자체가 압박으로 보일 수 있어요.”
민우는 잠시 테이프를 들고 있다가 그녀에게 넘겼다. 다빈은 봉인 번호를 읽고, 법률기관 직원에게 같은 번호를 다시 읽게 했다. 두 숫자가 일치한 뒤에야 경민이 보관함의 전원을 차단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화면에 ‘원격 명령 거부’라는 문구만 남았다.
서진은 화면을 촬영하며 백상호의 명의와 시간대를 따로 적었다. 그것만으로 접근 시도가 USB 탈취를 뜻하지는 않았다. 계정이 도용됐을 수도 있고, 사진을 보낸 사람이 실제 소유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 가능성을 표에 남겼다. 민우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리 직원이 봉인된 케이스의 크기를 확인했다. 사진과 일치했지만, 내용물은 열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다빈은 케이스를 향해 손을 뻗지 않고 공동수탁 확인서에 ‘제보자 정보 비공개’를 적었다.
서진은 그 문장을 보고 물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요?”
“그때 공개 범위를 다시 정할 거예요. 지금 결정할 수 있는 것만 결정하는 거죠.”
다빈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문장은 길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질문을 되돌려 보내는 대신, 자신의 조건을 먼저 만들고 있었다. 서진은 그 변화를 기록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성장은 관찰자가 붙이는 제목이 아니라, 다음 행동에서 드러나야 했다.
그날 저녁 분석실로 돌아온 서진은 도료 표본의 수지 경화도를 다시 보았다. 사건 전날 새 도료가 눌린 방향은 바퀴가 계단을 내려갈 때의 압력과 달랐다. 바퀴는 한 번은 천천히 밀렸고, 한 번은 급하게 하중을 받았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장비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 역시 가설이었다.
서진은 백상호의 작업표에 ‘시험 목적’이라고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정식 작업표에 없는 비상키 사용 2회’라고 적었다. 공백은 남았지만, 공백의 모양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시간이었고, 지금은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민우가 문가에서 물었다.
“그래도 백상호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까지 했겠습니까?”
“그 질문은 동기입니다. 지금 필요한 건 그 행동이 가능했던 사람의 목록이에요.”
“목록에는 백상호밖에 안 남을 겁니다.”
“그럼 그 결과를 적으면 됩니다. 예상한 답을 먼저 적지 말고요.”
민우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당신은 끝까지 사람을 화나게 하는군요.”
서진은 웃을 뻔했지만 입꼬리를 눌렀다. 수첩의 단어 상실 칸은 오늘도 비어 있었다.
밤 아홉 시, 장 모의 추가 로그가 도착했다. 파일 전송은 피해 발생 뒤 한 번이 아니라, 사건 전날 밤에도 있었다. 전송 제목은 ‘시야 시험용 보정본’이었다. 파일 내용은 열지 않았지만 해시와 전송 시간은 확인할 수 있었다. 백상호의 계정은 그 파일을 한 번 내려받았고, 장 모의 계정은 열두 분 뒤 외부 편집 서비스에 접속했다.
서진은 그 기록을 보고도 바로 결론을 쓰지 않았다. 누가 어떤 내용을 알았는지, 파일명이 실제 내용과 같았는지, 장 모가 보정본을 살인 계획으로 인식했는지 각각 질문으로 나눴다. 여름은 그 질문 목록을 읽은 뒤 백상호를 다시 부르기로 했다.
다빈의 휴대전화에는 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다음에는 아이 이름이 아니라, 네가 숨긴 이유를 공개한다.’
다빈은 메시지를 지우지 않고 공동 봉인함에 넣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먼저 경민에게 원본 보존 여부를 물었다. 경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빈은 화면을 촬영하고, 자신이 그 메시지를 보관했다는 사실을 직접 서명했다.
서진은 파란 삼각형 영수증의 고객번호를 사건표 안쪽에 붙였다. 숫자 일부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케이스의 두 겹 도료, 비상키 두 번, 사건 전날의 파일 전송, 그리고 보관함 원격 접근 실패가 한 줄의 질문으로 묶였다.
‘백상호는 무엇을 준비했고, 무엇을 몰랐으며, 누구에게 무엇을 넘겼는가.’
서진은 그 질문을 적은 뒤 펜을 닫았다. 대답은 아직 오지 않았다. 대신 보관함의 봉인 번호와 분석표의 시료 번호가 같은 서류철에 들어갔다. 그 정도면 다음 날을 시작할 증거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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