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증거가 아닌 목소리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7. 16.

조회수 7

김다빈은 피해자 지원실 문을 닫은 뒤에도 한동안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USB가 있었다는 말을 하면, 그 안에 있던 내용도 찾아낼 거죠?”

“내용을 묻지 않겠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그 말을 믿으라고요?”

“믿지 않아도 됩니다. 질문 범위를 문서로 적겠습니다.”

서진은 종이에 세 가지 질문을 썼다.

한재희가 USB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 USB를 누구에게 전달하려 했는가. USB의 내용이 아닌 전달 시각과 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가.

다빈은 세 번째 줄을 오래 보았다.

“받는 사람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확인하지 않겠습니다.”

“작성자는요?”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럼 뭘 조사합니까?”

“USB가 있었다는 사실과, 언니가 안전점검 조작 자료를 전달하려 했다는 시간표입니다.”

다빈의 입술이 떨렸다.

“언니는 밤 10시에 누군가에게 넘기려 했어요. 그 전에 저한테 연락이 오면, 제가 대신 보관해 달라고 했습니다.”

“연락이 왔습니까?”

“아니요. 언니가 제게 오지 못했어요.”

그 말이 한경민의 첫 오판과 연결되었다. 다빈은 미성년 제보자를 지키려고 통화 시각을 한 시간 늦췄고, 그 결과 한경민은 언니의 마지막 동선을 숨긴 사람처럼 보였다. 보호받은 아이는 경고를 한 시간 늦게 받았다. 거짓말은 한 사람을 가렸지만, 다른 사람의 선택권과 시간을 빼앗았다.

서진은 다빈에게 문서를 밀었다.

“이 사실을 확인서에 넣으시겠습니까?”

“USB 이름은요?”

“내용과 작성자는 제외합니다.”

다빈은 한 줄을 추가했다.

‘보호 대상이 이 기록 공개를 원하지 않을 경우, 이 확인서는 이름 없는 사건 사실로만 사용한다.’

서진은 그 문장을 받아들였다. 다빈이 보호를 대신 결정하는 위험은 남았지만, 이번에는 공개 범위를 협상하는 문서가 생겼다.

정오가 되자 한경민은 관리소 정정 통지 현장에 나타났다. 주민 대표는 그가 업무로 돌아오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정정문은 받겠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봤어요.”

다빈이 말했다.

“제가 시간을 늦췄습니다.”

“왜요?”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럼 우리에게는 거짓말해도 된다는 겁니까?”

다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요. 그래서 제가 한경민 씨에게 생긴 피해를 확인하러 왔어요.”

한경민은 그녀를 보았지만, 평소처럼 ‘다빈 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용서는 안 하겠습니다.”

다빈의 얼굴이 굳었다.

“용서해 달라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럼 뭘 원합니까?”

“제가 틀린 시각을 정정했다는 확인서에 서명하겠습니다. 소장님이 잃은 근무일과 회사 징계 이의에 그 문서를 쓰셔도 됩니다.”

한경민은 문서를 받지 않았다.

“아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까?”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제 피해만 남겠군요.”

“그 피해를 없애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한경민은 그제야 확인서에 서명했다. 용서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다빈의 정정이 실제 기록으로 남는 데 동의한 것이었다.

서진은 두 사람의 관계를 화해라고 적지 않았다. 보호 이유와 책임 비용이 같은 문서 안에 들어왔고,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후 2시, 회색실 증거판에는 두 개의 열이 생겼다.

첫 번째 열은 계단 충격, USB 탈취, 시신 이동. 두 번째 열은 17초 편집, 원격 세션, 삭제 로그.

민우가 백상호의 이름을 첫 번째 열에 적었다.

“케이스, 미반납 키, 문을 닫은 시각.”

여름이 두 번째 열 옆에 물음표를 적었다.

“원격 계정은 본사 소유입니다. 백상호가 물리 자료를 다뤘다고 해서 원격 편집까지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민우가 말했다.

“그럼 공범일 가능성은요?”

“가능성입니다. 연결 증거가 필요합니다.”

서진은 고객번호 일부를 파란 영수증 사진 옆에 놓았다. 원격 세션 결제자와 영수증의 번호가 일치하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USB는 사라졌고, 백상호는 USB를 묻지 않았는데 먼저 부인했습니다.”

“그건 수상합니다.” 민우가 말했다.

“하지만 USB를 빼앗았다는 사실은 아닙니다.”

“그럼 두 번째 가설을 어떻게 씁니까?”

서진은 증거판 중앙에 문장을 적었다.

‘백상호는 한재희가 가진 USB를 발견했거나, 그 USB가 사건을 드러낼 것을 알고 회수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아래에 반증 조건을 붙였다.

USB의 마지막 접촉 기록. 한재희의 05시 32분 이후 이동 기록. 백상호가 장부를 찾은 경로와 USB가 사라진 위치의 일치 여부.

“계단 가설과 분리했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사람이 계단에 있었던 것과 USB가 누구 손에 갔는지는 다른 질문입니다.”

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빈 씨의 보호 이유는 그 질문을 대신 해결하지 않습니다.”

다빈은 문밖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직원에게 작은 봉투 하나만 맡겼다.

봉투 안에는 한재희의 물건 목록이 있었다. USB 자체는 없었다. 대신 USB를 꽂았을 때 사용하던 짧은 케이블과, 22시 14분에 찍힌 편의점 결제 영수증이 들어 있었다.

서진은 영수증의 파란 삼각형을 보았다. 서버 옆에서 나온 영수증과 같은 모양이었지만, 고객번호는 달랐다.

민우가 말했다.

“같은 업체가 아닐 수도 있겠네요.”

“같은 표식이 다른 고객에게도 쓰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표식만으로 조직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다빈이 문밖에서 말했다.

“언니는 그 영수증을 USB와 같이 넣어 두었어요. 저한테 오지 못하면, 제가 케이블과 영수증을 보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라고요.”

“누구에게요?”

“그건 말하지 않겠습니다.”

서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결제 시각과 USB 케이블의 접촉 흔적을 별도 보존했다.

오후 4시, 백상호의 휴대전화 결제 기록은 사건 시간에 오프라인이었다. 그 사실은 그가 직접 결제하지 않았다는 뜻일 뿐, 물건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민우가 물었다.

“그럼 백상호가 USB를 빼앗았다는 가설은 약해지는 겁니까?”

“직접 결제 기록은 약해집니다. 물리 접근은 아직 남습니다.”

“계정과 사람을 또 나누는군요.”

“같이 쓰면 틀릴 때 두 개를 한꺼번에 고쳐야 하니까요.”

한경민이 증거판 앞에 섰다. 그는 백상호가 사건 전날 형광 도료를 주문한 전표를 꺼냈다. 배송지는 시설업체 본사가 아니라 개인 보관창고였다.

“이 전표는 어디서 났습니까?” 민우가 물었다.

“백상호가 반납하지 않은 키 기록을 확인하다가, 관리업체 문서함에서 봤습니다.”

“왜 이제 말합니까?”

“제가 백상호를 고용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진은 전표의 배송지를 지도에 표시했다. 서버가 있는 건물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전표에는 형광 도료의 제품번호가 있었고, 주문 수량은 계단 보수에 필요한 양보다 많았다. 그러나 그 도료가 사건 현장에 사용됐다는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민우가 증거판의 두 열 사이를 오갔다.

“22시 14분.”

서진은 서버 로그와 편의점 영수증의 시각을 나란히 놓았다. 둘 다 22시 14분이었다. 한쪽은 장비 기록, 다른 한쪽은 결제 기록. 시계가 정확히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서진은 그 시각을 원으로 묶었다. 원 안에는 세 개의 질문이 들어갔다.

누가 결제했는가. 누가 원격 세션을 열었는가. 누가 USB를 가지고 있었는가.

같은 시각이 세 사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누구도 확정하지 않았다.

다음 수사는 파란 삼각형의 뜻이 아니라,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장부에 나타난 이유를 묻는 일이 되었다.

도현은 장부를 맞추기 전에 각 기록의 시계부터 확인했다. 편의점 영수증은 결제 단말기 시각, 서버 로그는 네트워크 시각, 시설업체 전표는 문서를 만든 컴퓨터 시각이었다. 세 시계는 최대 41초 차이가 났다.

“22시 14분이 같은 순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증거판에 같이 올렸습니까?” 민우가 물었다.

“같은 순간일 가능성이 있는 구간으로 올렸습니다. 오차를 남긴 채로요.”

서진은 각 시각 옆에 오차 범위를 적었다. 22시 13분 19초부터 22시 14분 41초. 원 안의 숫자가 넓어지자, 세 사람이 한 장소에 있었다는 가설은 약해졌다.

한경민은 전표의 배송지를 다시 가리켰다.

“창고는 제가 한 번 가 봤습니다.”

“언제요?”

“사건 전날 오후입니다.”

“누구와요?”

“혼자.”

“왜 갔습니까?”

경민은 대답하지 않고 다빈을 보았다. 다빈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경민은 그녀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창고에 아이가 남긴 물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져왔습니다.”

서진은 그 사실을 보호 대상의 신원과 분리해 기록했다. 한경민이 창고에 접근할 이유는 있었지만, 형광 도료와 USB의 연결을 자동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여름은 다빈에게 물었다.

“한경민 씨가 아이의 물건을 보관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몰랐어요.”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공개를 원합니까?”

다빈은 한참 뒤 대답했다.

“아니요. 아이가 선택하게 하고 싶어요.”

그 말은 다빈이 모든 결정을 대신 쥐고 있던 방식과 달랐다. 아직 완전한 신뢰는 아니었지만, 보호의 범위를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행동이었다.

서진은 증거판 중앙에 새 문장을 적었다.

‘보호 목적은 관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물건의 이동은 별도 장부로 입증한다.’

밤 9시, 전표 배송지의 보관창고에 보존 통지가 전달됐다. 창고 관리자는 백상호의 이름을 바로 말하지 않았다. 대신 보관번호와 입고 시각을 확인해 주었다. 형광 도료 상자 세 개 중 하나가 사건 당일 새벽에 이동했다.

서진은 상자 안을 열지 않았다. 외부 라벨과 봉인 상태만 촬영했다. 창고 관리자는 그 방식에 동의했지만, 사진을 제공하는 대신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시간만 정했다.

민우가 말했다.

“사람마다 공개 범위를 정하니 수사가 느려집니다.”

여름이 답했다.

“느려진 만큼 누가 어떤 범위를 허용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서진은 두 사람의 말 중 어느 쪽도 정답으로 고르지 않았다. 수사는 느려졌지만, 보호 대상의 이름을 얻지 않고도 창고·전표·USB의 시간축이 좁혀졌다.

22시 14분이라는 숫자는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세 장부가 겹친 구간으로 남았다. 그 구간 안에서 누군가는 결제했고, 누군가는 원격 세션을 열었고, 누군가는 USB를 옮겼다.

서진은 그 셋이 같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적었다.

이번 화가 재미있었나요?

좋아요와 평점은 언제든 변경할 수 있습니다.

독자 평점 8.0 (3)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