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5두 장의 임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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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의 임명안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5. 25.

회색실 검토회의실 문 앞에는 두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윤서진의 배제안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식 분석 담당 임명안이었다. 두 문서는 서로 반대처럼 보였지만, 요구하는 내용은 같았다.

틀렸을 때 누가 멈출 수 있는지 정하라는 것.

민우가 회의실 안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서진은 첫날 계단이라는 감각을 질문으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한경민이 공개 용의선에 올랐고, 정정까지 하루가 걸렸습니다.”

서진은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능력의 출처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출력의 한계를 혼자 알고 있었고, 그 혼자 아는 것이 팀의 속도를 흔들었다.

한여름이 문서 한 장을 들었다.

“반대로 전면 배제하면 원본성 검토가 늦어집니다. 이 팀은 서진의 능력을 증거로 쓰지 않지만, 서진의 질문을 독립 검증으로 바꾸는 전문성은 필요합니다.”

위원 중 한 명이 물었다.

“그 능력이라는 건 정확히 뭡니까?”

서진은 손톱으로 수첩 모서리를 눌렀다. 능력을 말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었다. 다만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독립 증거보다 그녀의 감각을 먼저 찾을 것이다.

“저는 진술에서 누락 가능성이 큰 지점을 찾습니다.”

“어떻게요?”

“원음의 연속성, 화자의 어휘 변화, 시간 기록을 비교합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완전히 진실도 아니었다. 서진은 그 차이를 문서에 적을 수 없었다.

민우가 끼어들었다.

“분석 결과는 관찰·가설·검증 세 칸으로 나눕니다. 단독으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고, 제2검토자가 반대 가설을 확인하기 전에는 보고서에 올리지 않습니다.”

“제2검토자는 누굽니까?”

“사건에 따라 달라집니다. 법률 범위는 여름, 시간축은 도현, 현장 접근은 제가 맡습니다.”

서진은 그 말을 듣고 민우를 보았다. 그는 그녀의 판단이 혼자 권한이 되지 않도록 자리를 나눴다.

위원회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서진은 단독으로 원본 저장장치에 접근하지 않는다. 둘째, 능력의 출력은 기록의 사실란에 적지 않고 질문과 대안 가설을 만드는 데만 사용한다. 셋째, 오판이 확인되면 분석자·현장 책임자·공개 범위를 정한 사람이 각각 정정 사유와 후속 조치를 남긴다.

“수락하겠습니다.”

위원이 말했다.

“조건을 읽어 보지도 않았는데요?”

“읽었습니다. 배제되지 않는 대신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조건입니다.”

서진은 배제안 위에 서명하지 않았다. 제한 조건표에 먼저 서명했다.

오전 10시 20분, 회색실 작전판 앞에서 여름이 빈칸이 있는 표를 붙였다. 제목은 ‘회색표’였다.

관찰한 사실. 임시 가설. 대안 가설. 반증 조건. 공개 제한. 오판으로 생긴 피해.

민우가 마지막 칸을 보며 말했다.

“이건 매번 쓰면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을 아끼려고 사람 이름부터 붙이면 더 오래 걸립니다.” 여름이 말했다.

“긴급 상황은요?”

“긴급 예외를 두되, 사후 정정을 의무화합니다.”

서진은 계단 가설 아래에 세 줄을 나눠 적었다.

한경민이 계단에 갔다. 한경민이 다른 사람의 이동을 숨겼다. 누군가 계단을 이용했고 한경민은 그 사실을 늦췄다.

민우는 두 번째 줄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첫날 저는 첫 번째 가설을 용의선으로 바꿨습니다.”

서진은 그 옆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저는 계단이라는 감각을 먼저 말했습니다.”

여름은 공개 제한 칸에 다빈의 이름을 쓰려다 멈췄다. 이름 대신 ‘보호 대상’이라고 적었다.

그 순간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한경민이 들어왔다. 그는 회색표를 보자마자 여름이 붙인 마지막 문장을 가리켰다.

“오판으로 생긴 피해가 빠졌습니다.”

“지금 추가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미 피해를 입었습니다. 주민들은 아직도 제가 한재희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우가 일어났다.

“정정문은 배포했습니다.”

“정정문이 사람들의 기억을 되돌리지는 않습니다.”

민우는 반박하지 않았다. 한경민은 서진을 보았다.

“당신은 제 이름을 의심에서 빼고 싶습니까?”

“아니요. 의심의 범위를 다시 정하고 싶습니다.”

“그 말이 더 차갑군요.”

“제가 선의로 빼면,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넣을 수 있습니다.”

한경민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비상키 대장을 꺼냈다.

“백상호가 반납하지 않은 키가 있습니다. 그가 오늘 건물에서 장비를 회수하려 한다는 연락도 받았습니다.”

민우가 대장을 받으려 하자 경민이 손을 놓지 않았다.

“이건 제 관리 부실을 증명합니다. 그 사실도 함께 적어 주세요.”

“적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호하려고 숨긴 아이의 이름은 적지 마십시오.”

여름이 대답했다.

“이 문서에는 이름 대신 거부권을 남깁니다.”

경민은 그제야 대장을 놓았다.

서진은 새 조건표에 접근권을 적었다. 자신은 단독 원본 접근 금지. 민우는 긴급 보존 요청과 사후 정정. 여름은 공개 범위 거부권. 한경민은 자료 제공 여부와 보호 대상 비공개를 선택했다.

오후 1시, 외주업체 비상키 대장의 마지막 줄에 B.S.H. 미반납 서명이 남았다. 백상호의 서명 아래 반납 시각은 비어 있었다.

그날 그녀는 정식 분석 담당이 되었다. 권한은 늘었지만, 단독으로 믿어 달라는 권한은 줄었다.

회색실의 첫 사건은 범인을 잡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모르는 채 사람을 의심했는지, 누가 그 의심을 고쳤는지, 다음에는 어느 문 앞에서 멈춰야 하는지가 기록으로 남았다.

그리고 서버 장비를 회수하러 온 백상호가, 사라진 17초보다 먼저 회색실의 이름을 불렀다.

백상호는 오후 1시 12분, 관리실 뒤편 출입구로 들어왔다. 손에는 공구 상자가 있었고, 상자 안쪽에는 장비 반출 목록이 붙어 있었다. 목록에는 서버 본체와 백업 드라이브 두 개가 적혀 있었다.

민우가 출입구 앞을 막았다.

“반출은 보류합니다.”

“시설업체 소유 장비입니다.”

“사건 관련 원본이 들어 있습니다.”

“원본이 아니라 고객 데이터입니다. 계속 막으면 영업방해로 신고하겠습니다.”

한여름이 목록을 보았다.

“반출할 수 있는 장비와 보존할 데이터는 분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05시 20분부터 05시 40분까지의 로그와 저장장치 변경 이력입니다.”

“그걸 누가 보장합니까?”

“제가 범위를 작성하고, 민우 씨가 현장 입회를 합니다.”

백상호는 서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분이 분석관입니까? 계단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을 의심했다는?”

회의실 안 공기가 아주 조금 바뀌었다. 민우는 대꾸하려 했지만 서진이 먼저 손을 들었다.

“저는 계단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은 증거가 아닙니다. 그래서 독립 기록을 확인했고, 한경민 씨에 대한 첫 용의선은 정정했습니다.”

“그럼 이제 제 차례입니까?”

“아직 누구의 차례도 아닙니다. 장비의 위치와 접근 로그를 확인할 차례입니다.”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수사가 가능합니까?”

“사람을 의심하되, 의심을 사실처럼 쓰지 않는 수사는 가능합니다.”

그는 공구 상자를 내려놓았다. 서진은 물건을 만지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계속 늦추면 서버가 자동으로 덮어씌워집니다.”

“그래서 지금 보존 범위를 좁히는 겁니다.” 여름이 말했다.

“전부 복제하면 더 빠르죠.”

“전부 복제하면 사건과 무관한 고객 정보가 같이 들어옵니다. 그 자료를 누가 열람할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백상호는 한경민에게 몸을 돌렸다.

“소장님, 이분들 때문에 장비가 묶이면 업체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한경민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으면 관리소의 책임을 줄이기 위해 백상호 편에 섰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비상키 대장 위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제가 반출을 승인할 수는 없습니다. 미반납 키가 있는 상태라서요.”

“그 키가 제가 가진 키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아직 확인 중입니다.”

“그런데 왜 막으십니까?”

“확인 중이기 때문입니다.”

경민은 민우의 말투를 그대로 빌리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범위를 지켰다.

도현이 복제 장비를 들고 왔다.

“원본 저장장치는 건드리지 않고, 지정 시간대의 로그만 이미지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해시는 작업 전후에 확인합니다.”

백상호가 물었다.

“그 작업이 끝나면 장비를 가져가도 됩니까?”

“보존 명령 범위가 끝나면, 반출 여부를 다시 검토합니다.” 여름이 답했다.

서진은 회색표를 백상호 앞에 놓았다. 관찰 칸에는 단말기 접속, 시간 지연, 비상키 미반납이 적혀 있었다. 가설 칸에는 두 가능성이 나란히 있었다.

“반증 조건이 없는데도 사람을 붙잡은 겁니까?” 백상호가 물었다.

민우가 대답했다.

“붙잡은 게 아니라, 나가지 말라고 통지한 겁니다.”

“둘이 다릅니까?”

“다릅니다. 다르지 않게 행동하면 우리가 정정해야 합니다.”

백상호는 시설업체 감독자 입회 아래 단말기 비밀번호를 제공했다. 여름은 이를 원본 접근 조건의 확인으로 기록했다.

복제는 1시 41분에 시작됐다. 서버 로그의 시간과 단말기 시간이 달라, 도현은 두 시간축을 따로 표시했다. 05시 29분 접속은 실제 서버 시간으로 05시 35분 12초였다.

서진은 숫자를 보고도 백상호의 이름을 가설 칸에서 지우지 않았다. 대신 옆에 ‘단말기 접속 시각만으로 계단 접근 불가’라고 적었다.

복제가 끝나자 해시 두 개가 일치했다. 원본 저장장치는 반출되지 않았다. 백상호는 장비를 두고 나가면서 서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필요하면 연락하십시오. 저는 협조했습니다.”

서진은 명함을 받았지만, 협조라는 단어를 사실란에 적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제공했고 무엇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지만 기록했다.

회의실로 돌아오자 여름이 회색표의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

“오판으로 생긴 피해.”

서진은 한경민의 이름을 적고, 옆에 ‘정정문 배포·업무 복귀 거부 상태’라고 썼다. 다빈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보호 대상의 선택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민우는 자신의 이름도 추가했다. “첫날 공개 용의선 전환 책임.”

“분석관의 책임은요?”

“능력 출력의 비공개와 질문 전환 지연.”

서진이 말했다.

그날 회색실은 첫 규칙을 만들었다. 누구도 정답을 가진 척하지 않는다. 틀린 판단은 지우지 않는다.

서진은 새 조건표의 복사본을 접었다. 종이 한 장으로 믿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다만 누군가의 손이 다른 사람의 결론을 멈출 수는 있게 되었다.

서버에 남은 파란 삼각형 단말기 기록은 아직 사건의 끝이 아니었다. 17초를 만든 사람도, 한재희가 계단에서 만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수사부터 서진은 혼자 듣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질문 옆에는 반증 칸이 붙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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