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도 되는 줄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5. 23.
김다빈은 문자를 보여 주는 대신, 휴대전화 화면을 자기 쪽으로 기울였다.
“이 부분은 읽어도 되지만, 이 줄 아래는 안 됩니다.”
서진은 화면을 보았다. 한재희가 죽기 전 보낸 메시지는 짧았다.
‘8층. 엘리베이터 말고.’
그 아래에는 이름과 주소가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었다. 다빈은 가린 부분을 손가락으로 덮고 있었다.
“원문을 복제하지 말라는 뜻이죠?”
“네. 아이가 이 문장을 보낸 사람을 알면, 그 사람도 위험해져요.”
“그럼 시간과 문장만 기록하겠습니다.”
“시간도 조심해 주세요.”
다빈은 한재희가 메시지를 보낸 시각 05시 31분 58초를 직접 확인한 뒤에야 말했다. 서진은 화면을 촬영하지 않고 수첩에 적었다. 다빈이 허용한 범위를 넘지 않는 것과 수사에 필요한 사실을 남기는 것은 동시에 가능해야 했다.
한여름은 옆에서 공개 제한표를 펼쳤다.
“보호 대상 이름, 연락처, 학교는 수사팀 내부에서도 봉인합니다. 다만 이 문장이 한재희의 동선과 관련 있다는 사실은 기록합니다.”
다빈은 표의 마지막 줄을 읽었다.
“제가 나중에 철회할 수 있나요?”
“원문 공개는 철회할 수 있습니다. 이미 확인된 사실까지 지우면 정정 사유가 필요합니다.”
“그럼 제가 한 거짓말도 남나요?”
서진이 대답했다.
“남아야 합니다. 거짓말의 이유와 그 거짓말 때문에 의심받은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요.”
다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이름이 적힌 정정문을 두 번 읽고 서명했다.
오전 11시, 회색실은 한재희의 통신 기록과 승강기 서버를 맞췄다. 05시 31분 44초에 휴대전화가 8층 와이파이에 붙었고, 05시 32분 14초에 비상계단 센서가 열렸다. 메시지 발송은 그보다 16초 전이었다.
“문자를 보낸 뒤 계단으로 움직였네요.” 민우가 말했다.
“그건 가능성입니다.” 도현이 바로 끊었다. “휴대전화가 다른 사람 손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재희가 들고 있었다는 기록은요?”
“통화 중 가속도 센서가 있습니다. 걸음에 가까운 변화가 05시 32분 02초부터 05시 32분 09초까지 이어집니다. 하지만 휴대전화의 움직임이지, 사람의 이동 자체는 아닙니다.”
서진은 도현의 말에서 숫자를 빼지 않았다. 불완전한 기록은 불완전한 채로 남아야 했다.
민우는 한경민의 마스터키 사용 이력을 확인했다. 04시 58분, 비상키가 관리실 대장에서 빠졌다. 05시 11분, 관리실 출입문이 열렸다. 05시 18분, 한경민이 서버실에 들어갔다. 계단 센서가 열린 05시 32분에는 경민의 출입 기록이 없었다.
“경민은 계단에 없었군요.”
“출입 기록에 없다는 뜻입니다.” 서진이 말했다. “계단에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민우가 한숨을 쉬었다.
“그 문장을 계속 붙여야 합니까?”
“우리가 모르는 걸 아는 척할 때마다 누군가의 직업과 관계가 바뀝니다.”
오후에는 한경민이 직접 회색실로 찾아왔다. 그는 정정문에 서명한 뒤에도 관리소장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주민 대표는 그가 한재희의 마지막 시간을 조작했다고 믿었다.
“저는 다빈 씨 동생을 숨기려고 했습니다.” 경민이 말했다. “그 아이가 한재희 씨에게 연락한 걸 알았습니다.”
“왜 다빈 씨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다빈 씨가 이름을 말할까 봐서요.”
“그럼 본인이 결정할 일과 다빈 씨가 결정할 일을 대신 정한 겁니다.”
경민은 시선을 내렸다.
“아이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보호받는 사람이 누구에게 어떤 설명을 들을지는요?” 여름이 물었다. “그 선택권도 보호에 포함됩니다.”
경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진은 그 침묵을 악의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의로 면제하지도 않았다.
“한재희 씨가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계단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른 사람이 있었습니까?”
경민의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그런 단어는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들은 감각은 증거가 아닙니다.”
서진은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직접 말하지 않고, 그 한계를 말하는 쪽을 택했다. 민우가 그녀를 보았다. 여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경민은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시설업체 비상키 대장이었다. B.S.H. 키는 전날 04시 58분에 백상호에게 넘어갔고, 반납란은 비어 있었다.
“이걸 왜 지금 내놓습니까?”
“제가 숨긴 사실을 정정했으니까요.”
“대가를 원합니까?”
“아닙니다. 다만 제 정정문과 이 자료를 별개로 처리해 주세요. 제가 잘못한 일까지 사라지면 안 됩니다.”
서진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사람의 협조를 사과 수락과 거래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저녁, 백상호의 작업지시서가 도착했다. 그는 05시 20분부터 06시까지 서버실 장비 점검을 맡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작업지시서의 전자서명은 06시 04분에 생성됐다. 종이 출력물에는 05시 20분이라는 수기 시간이 남아 있었다.
두 시간은 모두 사실일 수 있었다. 현장에 먼저 도착했고, 나중에 문서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문서를 나중에 꾸며냈을 수도 있다. 서진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도현이 전력 계량 로그를 가져왔다. 서버실의 보조 전원은 05시 27분부터 05시 36분까지 평소보다 18퍼센트 높은 값을 기록했다. 누가 있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지만, 장비가 실제로 작동했다는 사실은 남겼다.
“백상호가 장비를 점검했을 가능성은 올라갑니다.”
“그가 계단에 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민우가 말했다.
서진은 민우를 보았다. 그가 먼저 반증 조건을 말하고 있었다.
그날 밤, 한재희의 동생 다빈은 정정문 사본을 들고 관리실 앞에 섰다.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녀는 한경민을 대신해 해명하지 않았다.
“언니의 통화 시간은 제가 늦춰 말했습니다. 보호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한경민 씨가 의심받은 사실도 인정합니다.”
다빈은 보호 대상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한경민에게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대신 정정문을 주민 대표에게 내밀었다.
“이 문서의 공개 범위는 제가 정합니다. 이름을 요구하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주민 대표는 문서를 받지 못했다. 민우가 공개용 사본을 대신 내밀었다. 이름과 연락처는 지워졌지만, 통화 시간의 정정과 한경민에 대한 오판은 남아 있었다.
서진은 그 장면을 보며 공익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기로 했다. 공개해야 할 사실과 공개하지 않을 권리가 같은 장소에 놓여 있었다.
서버 접속 목록에서 파란 삼각형 단말기의 위치가 확인됐다. 그것은 관리실 컴퓨터가 아니라, 외주업체가 사용하는 이동식 단말기였다. 단말기는 05시 29분에 8층 무선망에 붙었다가 05시 33분에 끊겼다.
백상호는 그 시간에 서버실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작업지시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서진은 화면을 닫고, 민우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백상호의 말이 아니라 단말기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경민 정정문은 오늘 공개합니다.”
“이름 없는 사람의 선택은 공개하지 않고요.”
“그렇게 하죠.”
첫 번째 오판은 정정되었다. 그러나 17초 안에 있던 사람의 이름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파란 삼각형 단말기의 접속 기록만, 다음 화의 문턱에 남았다.
서진은 단말기 원본을 복제하기 전에 한여름에게 접근 범위를 확인했다. 장치 전체를 가져오면 외주업체의 다른 고객 정보까지 함께 들어왔다. 특정 시각의 네트워크 로그와 위치 정보만 보존하는 방식이 더 느렸지만,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의 기록을 덜 건드렸다.
“그렇게 좁히면 중요한 파일을 놓칠 수 있어요.” 민우가 말했다.
“넓히면 중요한 파일이 있어도 법정에서 설명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여름이 대답했다.
서진은 두 사람의 말을 같은 칸에 적었다. 속도를 잃을 위험과 사생활을 침해할 위험. 둘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누가 어느 위험을 감수했는지 남겨야 했다.
백상호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단말기 전체를 제출하거나, 05시 20분부터 05시 40분까지의 접속·위치·전력 로그를 입회하에 복제하는 것. 그는 처음에 전체 제출을 거부했고, 한경민의 비상키 대장을 보자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저는 장비를 빌려준 사람이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아닙니다.”
“그 둘 중 어느 쪽인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오늘 확인하는 건 장비가 어디에 있었는지입니다.”
복제 과정에서 단말기의 시간이 서버보다 6분 12초 느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05시 29분의 접속은 실제로 05시 35분일 수도 있었다. 숫자 하나가 용의선을 밀어 올리는 대신, 시간표를 다시 흔들었다.
민우는 백상호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대신 수색 범위를 수정했다. 서진도 백상호의 이름 옆에 붙인 별표를 지웠다. 지운 자리에는 ‘시간 보정 후 재검토’라고 적었다.
한경민은 그 수정을 지켜보다가 낮게 말했다.
“제가 받은 정정은, 저한테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민들은 제가 아이를 숨겼다는 사실만 알아요. 제가 왜 숨겼는지는 모르죠. 그래도 그 이유를 공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진은 그 말을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 않았다.
“그럼 공개하지 않을 권리와, 공개하지 않아서 생긴 피해를 함께 기록하겠습니다.”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를 받아들였다는 표시가 아니라, 다음 질문을 거절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서진은 단말기 복제본의 봉인 번호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누가 원본을 열어 보았는지보다, 누가 열어 보지 않기로 했는지도 기록했다. 보존은 수집량이 아니라 접근의 책임으로도 측정됐다. 서진은 봉인 번호와 담당자 이름을 같은 줄에 적었다. 기록을 지킨 사람도 사건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 줄은 다음 검토자가 먼저 읽을 자리였다. 매번. 먼저. 다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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