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수되지 않은 신발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5. 21.
한경민의 신발은 압수되지 않았다. 그는 정정문에 서명한 뒤에야, 임의 제출 범위 안에서 신발 밑창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했다.
“발바닥까지 보여 주면 제가 도주한 사람처럼 보이겠죠.”
“이미 그렇게 보이는 게시물이 있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그래서 사진이 필요합니다.”
경민은 한쪽 신발을 벗어 봉투 위에 올렸다. 밑창 홈에는 회색 가루가 남아 있었다. 서진은 가루를 긁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홈의 깊은 곳에 있는 가루와 가장자리의 가루가 눌린 방향이 달랐다. 최근에 묻은 것인지 오래된 것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민우가 사진을 보며 말했다.
“도료는 계단과 같은 계열입니다.”
“같은 계열이지 같은 입자는 아닙니다.”
“가설은 올라가겠네요.”
“두 가설 모두요. 한경민이 계단을 밟았거나, 관리소장이 아닌 누군가가 같은 공사 구역을 지나갔거나.”
민우는 답답하다는 듯 코끝을 눌렀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가능성의 목록이 아니라, 오늘 안에 줄어드는 이름이었다.
서진은 한재희의 휴대전화에서 추출한 값을 도현에게 넘겼다. 배도현은 시간축을 다루는 사람이었고, 숫자를 사람의 의도로 바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8층 와이파이 접속은 05시 31분 44초부터 05시 32분 07초까지입니다.”
“그 시간에 승강기는?” 민우가 물었다.
“1층 대기. 블루투스 연결 없음.”
“휴대전화만 8층에 있었다는 뜻입니까?”
“휴대전화가 그 네트워크에 접속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들고 갔는지는 별도 확인입니다.”
도현은 단정하지 않았다. 서진은 그 문장을 그대로 기록했다.
오전 10시, 회색실은 8층 비상계단을 다시 봉인했다. 이번에는 출입문을 열기 전에 문 아래에 투명한 기준선을 깔았다. 도어클로저의 긁힘과 먼지 자국을 한 번에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문 안쪽 벽에는 희미한 파란 삼각형이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에 누군가 펜으로 표시한 모양이었다.
“현금영수증과 같은 표식이네요.” 민우가 말했다.
“같은 모양입니다. 연결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서진은 표식의 꼭짓점 세 곳을 촬영했다. 왼쪽 꼭짓점은 벽에 붙어 있었고, 아래 꼭짓점은 먼지 위에 그려져 있었다. 표시한 시점이 다를 가능성이 있었다.
“이걸 그린 사람을 찾으면 되겠습니까?”
“그 전에 누가 이 벽을 볼 수 있었는지부터요.”
한경민은 관리소장용 마스터키를 제출하지 않은 상태였다. 시설업체 직원 백상호는 ‘아침에 장비를 점검하러 왔다’고 했지만, 관리실 출입 기록에는 06시 02분 이전의 입력이 없었다.
“그럼 백상호가 기록을 지웠군요.” 민우가 말했다.
서진은 그 문장을 듣자마자 벽에 붙은 가설표에서 백상호의 이름을 한 칸 옮겼다. 의심 대상이 아니라 검증 대상 칸으로.
“출입 기록이 없다는 것은 기록이 없다는 뜻입니다. 들어오지 않았다는 뜻도, 지웠다는 뜻도 아닙니다.”
“분석관.”
“지금 이름을 붙이면, 나중에 틀렸을 때 그 이름을 되돌리는 데 또 하루가 걸립니다.”
민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서버 보존 신청서에 백상호의 외주 작업지시서와 시설업체 비상키 반납 대장을 추가했다.
그날 오후, 백상호가 관리실에 왔다. 그는 현관에서부터 손을 들고 웃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아직 모릅니다.” 민우가 말했다.
“그런데 출입 기록을 찾으신다면서요.”
“작업지시서 확인이 먼저입니다.”
백상호는 한경민을 보지 않았다. 한경민도 그를 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열쇠 대장만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서진은 백상호의 손등을 보았다. 오른손 검지에 하얀 페인트가 묻어 있었고, 손톱 아래에는 파란 잉크가 들어가 있었다. 표식과 관련 있을 수도 있었다. 시설 점검표에 펜을 사용했을 수도 있었다. 손등만으로는 둘을 가를 수 없었다.
“어제 05시 30분부터 06시 10분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집에 있었습니다.”
“혼자요?”
“네.”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요?”
“없습니다.”
백상호는 대답을 잘했다. 너무 잘해서 한경민의 진술과 같은 방향으로 비어 있었다.
민우가 압박을 높이려는 순간, 서진의 전화가 울렸다. 김다빈이었다.
“서진 씨, 언니가 05시 32분에 계단에서 누군가를 봤다는 문자를 남겼어요.”
“원문을 보내 줄 수 있습니까?”
“안 돼요. 아이 이름이 들어 있어요.”
“그럼 화면을 보여 주고, 이름은 가린 상태로 직접 선택해 주세요.”
다빈은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통화를 끊지 않은 채 말했다.
“그 문자를 넘기면 그 아이가 찾아갈 거죠?”
“우리는 이름이 아니라 시간과 문장 구조만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는 말이 사람을 안심시키지는 않아요.”
서진은 침묵했다. 다빈이 자료를 주지 않는 것은 수사를 방해하는 선택이 아니었다. 공개하지 않을 항목을 정하고 수사의 순서를 바꾸는 선택이었다.
“그럼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저장하지 않고, 당신이 가린 부분은 가린 채로요.”
다빈은 한참 뒤에 동의했다.
문자에는 ‘8층에서 그 사람을 봤어. 그런데 엘리베이터 소리가 아니었어.’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과 장소의 일부는 검은색으로 가려져 있었다. 시각은 05시 32분 11초.
서진은 문자 한 줄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다. 다빈이 허용한 것은 확인이지 복제가 아니었다. 대신 시간과 문장만 기록했다.
민우가 물었다.
“그 사람이 백상호입니까?”
“모릅니다.”
“문자에 그렇게 적혀 있나요?”
“아니요. 그래서 모릅니다.”
경민이 그때 처음 입을 열었다.
“한재희는 그 시간에 누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다빈이 전화 너머에서 숨을 들이켰다. 서진은 경민을 보았다.
“그걸 왜 지금 말합니까?”
“제가 숨기고 있었으니까요.”
“누구를 보호하려고요?”
경민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다빈을 보지 않고 서진의 수첩만 보았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아이가 사건에 끌려오지 않게 해 주세요.”
“그 거짓말 때문에 누군가가 한경민 소장을 의심받게 된 것도 기록에 남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경민은 정정문을 다시 받았다. 이번에는 서명하기 전에 문장을 하나 고쳤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사실을 늦췄다’가 아니라 ‘사실을 늦춘 결과 다른 사람이 의심받는 것을 알고도 침묵했다’였다.
서진은 그 문장을 보고 펜을 내려놓았다. 보호는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
저녁 6시, 도현이 서버에서 다른 값을 찾아냈다. 계단 도어센서가 05시 32분 14초에 열렸다가 17초 뒤 닫혔다. 센서는 문이 열린 사실만 기록했고, 누가 열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한재희의 문자 시각과 3초 차이였다.
백상호의 손등에 묻은 페인트가 바로 범행을 증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계단, 센서, 문자, 외주 작업자의 접근권이 같은 시간대에 모였다.
민우가 백상호에게 말했다.
“오늘은 출국하지 마십시오.”
“제가 용의자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확인할 게 남았다는 뜻입니다.”
백상호는 웃음을 거두었다.
서진은 수첩 한쪽의 ‘계단’을 다시 보았다. 능력이 들려준 단어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단어가 던진 질문을 독립 기록들이 붙잡고 있었다.
한경민에 대한 첫 가설은 무너졌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보호하기 위해 시간을 늦춘 사람과, 그 늦어진 시간을 이용한 사람을 같은 칸에 둘 수 없게 되었다.
다음 확인 대상은 계단 문이 아니라, 그 문이 열리기 3초 전에 서버에 접속한 단말기였다.
서버실로 돌아온 뒤, 민우는 한경민을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취조실이 아니라 열린 관리실이었다. 여름은 문 옆에 앉아 열람 범위를 적었고, 서진은 녹음기를 켜지 않았다. 한경민이 자신의 말을 어느 범위까지 남길지 먼저 선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제가 다빈의 동생을 보호하려고 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경민이 말했다. “하지만 한재희가 그 아이를 만났다는 사실까지 숨기면 안 됐습니다.”
“왜 숨겼습니까?”
“아이 아버지가 알게 되면 데려갈 겁니다. 그 집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한재희의 마지막 동선을 늦춘 책임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변명하지 않고, 정정문에 적힌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문장은 그대로 두겠습니다.”
민우가 말했다.
“그리고 제가 오늘 아침 소장님 이름을 공개 용의자로 올린 건 우리 책임입니다. 정정문에 제 이름도 넣겠습니다.”
경민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사과를 받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비상키 반납 대장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백상호 키가 하나 비어 있습니다. 어제 반납받지 못했습니다.”
“왜 바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하면 제 관리 부실이 먼저 드러나니까요.”
“그 침묵도 기록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진은 대장을 넘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마지막 줄만 확인했다. B.S.H. 비상키, 미반납. 서명 옆에는 04시 58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한재희의 휴대전화가 8층에 접속하기 34분 전이었다.
시간은 범인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누가 어떤 책임을 미룰 수 있었는지 보여 주었다.
서진은 정정문 세 부를 봉인했다. 한 부는 한경민에게, 한 부는 회색실 기록함에, 한 부는 다빈에게 돌아갔다. 다빈의 봉투에는 이름 없는 문자가 포함되지 않았다. 보호 대상의 비밀은 수사에 필요한 사실과 분리되었다.
서버 화면의 접속 목록에는 낯선 단말기 하나가 남아 있었다. 소유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서진은 그 목록을 확대하다가 멈췄다. 단말기 이름의 끝에 파란 삼각형 모양의 기호가 붙어 있었다. 기호는 방향이었고, 방향은 아직 증거가 아니었다. 서진은 화면을 닫지 않은 채 다음 담당자의 이름을 옆에 적었다. 이번에는 혼자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름 아래에는 반대 가설을 적을 칸도 남겨 두었다. 다음 사람의 확인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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