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은 계단
증거분석관은 빠진 말을 듣는다 · 2026. 5. 19.
한경민은 계단이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05시 10분부터 05시 30분까지 관리실에 있었다고 말했다. 서버가 꺼진 시간도, 비상계단의 잠금 상태도, 자신이 확인한 방식도 빠짐없이 설명했다. 말은 매끄러웠다. 너무 매끄러워서 서진은 바디캠의 파형을 먼저 봤다.
진술 원음에는 끊김이 없었다. 한경민이 직접 참여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졌다. 편집 흔적도 없었다. 서진은 이어폰을 벗으려다 손을 멈췄다.
“소장님.”
경민이 그녀를 보았다.
“05시 18분에 관리실 문을 잠갔다고 했죠.”
“네.”
“그 전에 어디를 확인했습니까?”
“서버와 승강기 모니터요.”
“계단은요?”
“말씀드렸듯 비상계단은 잠겨 있었습니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서진의 귀 안쪽에서 다른 단어가 떨어졌다.
“계단.”
한경민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단어는 진술의 문장 사이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문장이 숨긴 자리에 박혔다. 주어도 없었다. 누가 계단에 갔는지, 언제 갔는지, 실제로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서진은 곧바로 재생을 멈췄다.
왼쪽 수첩에 ‘출력: 계단’이라고 적고, 오른쪽에는 ‘주어 없음 / 시점 없음 / 진위 없음’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 한 줄을 더 쓰려는데,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눈앞의 쇠막대가 보였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 뭐라고 하죠?”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서진은 난간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차가운 금속에 닿았다.
“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 모양만 만들어졌다. 서진은 수첩에 ‘잃은 말: ___’이라고 적었다. 능력은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말 하나를 가져갔다.
“분석관?”
“괜찮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거짓말했다. 괜찮지 않았다. 한 단어가 사라진 것보다, 사라진 단어를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다.
민우는 그녀의 손이 쇠막대를 가리킨 것을 보았다.
“계단에서 뭘 찾았습니까?”
“계단이라는 단어가 들렸습니다.”
말하고 나서 서진은 자신이 너무 빨리 말했음을 알았다. 민우의 눈이 바디캠과 한경민 사이를 오갔다.
“소장님이 한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근거가 아니네요.”
민우는 짧게 결론을 냈다. 그 말이 서진의 불안을 조금 낮췄다.
“질문으로만 쓰세요. 계단에 누가 갔는지, 어떤 시간대가 비는지, 다른 기록이 있는지. 셋을 확인한 다음에야 사람 이름을 붙입니다.”
한경민이 의자를 뒤로 밀었다.
“제가 계단으로 갔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방금 계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단어의 출처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당신의 진술과 같은 원음 안에 있지만, 진술에 들어 있는 말은 아닙니다.”
경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식이면 누구 말도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해석하지 않으려고 두 가설을 적었습니다.”
서진은 수첩을 돌려 보였다. 하나는 한경민이 계단을 이용했다는 가설. 다른 하나는 한경민이 보호하려는 사람의 말에서 계단이 빠졌다는 가설. 어느 쪽도 사실 칸에 들어가지 않았다.
민우는 이미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8층 계단 다시 확인한다. 임의 제출 가능한 범위에서 신발과 열쇠 기록 요청.”
한경민이 바로 막았다.
“열쇠는 안 됩니다.”
“왜요?”
“개인 보관품입니다.”
“전날 마스터키 사용 기록이 사건 시간과 겹칩니다.”
“사용 기록이 아니라 열쇠 자체입니다. 정정문도 없이 가져가려는 건 압박이죠.”
민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은 수사 중입니다.”
“그래서 거부하는 겁니다. 가져가면 돌려받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서진은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거절은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정보를 가진 사람이 정한 범위였다. 여름이 도착했을 때, 서진은 수첩에 ‘마스터키 제출 거부: 정정·보관 조건 요구’라고 적고 있었다.
“계단 단어 때문에 수색 범위를 넓힌 건 맞습니까?” 여름이 물었다.
“단어는 질문입니다.” 서진이 말했다. “수색은 문턱 도료와 센서 기록 때문에 하는 겁니다.”
민우가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을 보고서에 쓸 수 있습니까?”
“그렇게 쓸 수 있습니다.”
“난간을 가리킨 건요?”
서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단어를 잃었다는 사실은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증거가 아니었다. 여름이 그녀 대신 문장을 고르지 않고 기다렸다.
“개인적인 신체 반응입니다. 사건 증거가 아닙니다.”
서진이 말했다.
민우는 수색 인원을 계단과 서버실로 나눴다. 서진은 서버실 쪽에 남았다. 계단을 찾으라는 단어를 듣고 계단만 보게 되는 것이 싫었다.
오전 08시 20분, 회색실 차량 안에서 그녀는 진술 원음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능력을 쓰지 않았다. 한경민의 숨이 05시 18분 문장 앞에서 한 번 길어졌고, ‘외주업체’라는 말을 할 때만 존칭이 사라졌다. 그 변화는 수상했지만 범행을 증명하지 않았다.
서진은 네 개의 동사를 적었다.
보았다. 잠갔다. 피했다. 옮겼다.
계단이라는 단어는 네 동사 어느 쪽에도 붙지 않았다.
민우가 차량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계단 바닥은 물청소됐습니다. 출입 로그는 서버 재부팅 구간이 비어 있고요.”
“다른 기록은요?”
“8층에서 올라간 와이파이 접속 하나, 승강기 블루투스 미접속. 한재희 휴대전화가 남긴 값입니다.”
서진은 지도 위 8층 계단을 바라보았다. 단어가 가리킨 장소가 아니라, 두 개의 독립 기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재희가 계단을 올라갔을 가능성은 높아졌습니다.”
“한경민은?”
“아직 모릅니다.”
민우가 숨을 내쉬었다.
“그 대답을 보고서 첫 줄에 쓰면 팀장이 싫어할 겁니다.”
“그래도 첫 줄에 쓰겠습니다.”
민우는 한경민의 이름이 퍼진 단체 대화방 캡처를 내밀었다. ‘관리소장 계단 도주’라는 문장이 익명으로 올라와 있었다. 서진은 게시 시각을 봤다. 08시 12분. 계단 수색 결과가 나오기 전이었다.
“누가 먼저 이걸 알았죠?”
“그걸 찾는 중입니다.”
“계단이라는 말이 너무 빨리 사람 이름에 붙었습니다.”
민우는 캡처를 접었다.
“그래서 오늘은 한경민을 공개 용의자로 올리지 않습니다.”
그 말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오전 09시, 주민 대표가 관리실 앞에서 한경민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한재희의 동생 김다빈도 그 자리에 있었다. 다빈은 손에 휴대전화를 쥔 채, 한경민을 보지 않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서진은 다빈에게 가까이 갔다.
“어제 언니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시간, 11시라고 했죠.”
다빈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모서리를 눌렀다.
“네.”
“그 시간은 누가 정했습니까?”
“제가요.”
“왜요?”
다빈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서진은 계단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제보자와 관련 있습니까?”
다빈의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
여름이 서진의 옆에 섰다.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지금 말하지 않으면 한경민의 시간표가 사실처럼 굳을 수 있어요.”
다빈은 한참 뒤에 말했다.
“언니가 만나던 아이가 있어요. 이름은 말할 수 없습니다. 언니가 그 아이에게 약속했어요. 아무도 모르게 하겠다고.”
“그래서 통화 시간을 늦췄습니까?”
“네. 아이가 먼저 연락했다는 게 드러나면 보호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 거짓말 때문에 한경민이 의심받았다. 다빈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보자의 이름을 내놓는 순간 또 다른 사람이 노출된다.
서진은 다빈에게 정정문과 비공개 확인서 두 장을 내밀었다.
“통화 시간은 고치되, 아이 이름은 봉인하겠습니다. 한경민에게 생긴 피해는 정정문에 남깁니다.”
다빈이 종이를 보았다.
“그럼 언니가 왜 그 아이를 만났는지는요?”
“독립 기록으로 확인하겠습니다. 당신의 비밀을 답으로 쓰지 않겠습니다.”
다빈은 펜을 잡았다. 바로 서명하지 않고, 공개 제한 문구에 한 줄을 덧붙였다.
‘보호 대상의 신원은 수사팀 내부에서도 필요한 사람만 열람한다.’
서진은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한경민의 신발에서 계단 도료와 같은 계열의 회색 가루가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날 밤이 아니라 일주일 전 관리실 공사 때 묻은 것일 수도 있었다. 가루는 의심을 키웠지만, 사람을 확정하지 못했다.
민우는 정정문 초안을 들고 왔다.
“한경민을 계단 도주 용의자로 공개 전환한 게시물에 대해, 근거 부족을 명시합니다.”
“그가 무죄라는 뜻은 아닙니다.”
“압니다. 그래서 그렇게 쓰지 않았습니다.”
서진은 수첩의 빈칸을 보았다. ‘잃은 말: ___’. 오후가 되도록 난간이라는 단어는 돌아오지 않았다.
민우가 그 칸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시선을 돌렸다.
“내일 원본 서버를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한경민의 마스터키 사용 이력.”
“둘 중 하나만 오전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서진은 계단 사진 아래에 ‘쇠로 된 것’이라고 적었다. 쓰지 못하는 단어를 대신할 말이었다.
계단은 질문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 질문은 이미 한 사람의 이름을 끌어올렸고, 그 이름을 되돌리는 데 하루가 걸렸다.
서진은 정정문 하단에 담당자 이름을 세 번 확인했다. 먼저 의심한 사람, 의심을 퍼뜨린 사람, 그리고 그 의심을 고친 사람이 달라야 했다. 이름 하나를 지우는 것보다, 지워지지 않게 남기는 일이 더 오래 걸렸다. 그녀는 수첩의 빈칸을 덮지 않았다. 단어가 돌아오는 날까지, 누락도 사건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빈칸 옆에는 회복 시각을 적을 자리도 남겨 두었다. 능력의 비용도 다른 증거처럼 날짜와 관찰자를 가져야 했다. 서진은 그 기록을 접어 주머니 안쪽에 넣었다. 잃은 말보다 먼저, 잃지 말아야 할 책임을 보관하는 자리였다. 수첩의 다음 줄은 비워 두었다. 기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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