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이름 없이 남는 것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11. 3.

조회수 0

윤태경은 새 법인 이름을 적지 않은 제안서를 채권자 앞에 놓았다.

첫 장에는 법인명이 아니라 기능만 있었다. 무지 포장 라인, 제어부, 안전 정비 전 은박 라인 자재, 낮 교대 작업자 중 희망자, 확인된 소량 주문. 그는 회사를 둘로 나누자는 말도 쓰지 않았다. 지금 가진 것은 폐업안을 피할 만한 이름이 아니라, 오늘도 움직일 수 있는 기능 몇 개였다.

임대 설비 채권자가 물었다. “이걸 새 법인으로 옮기겠다는 겁니까?”

“별도 임대 구조를 제안하는 겁니다.” 태경이 말했다. “기능을 유지하는 설비와 작업을 계약으로 분리하고, 법인 자산 전체를 자동 승계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 법인을 지배합니까?”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채권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지배할 사람도 없는데, 왜 장비를 내줍니까?”

“내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장비가 현금·임금·안전에 연결되는지 확인하고, 그 부분만 제한된 임대로 쓰자는 겁니다.”

백나린은 회의실 끝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자신의 회사 로고가 찍힌 명함이 놓여 있었다. 제안서 어디에도 그 로고는 없었다.

“브랜드는요?” 그녀가 물었다.

태경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은 법률보다 먼저 나왔다. 새 법인이 만들어지면, 나린은 회사 이름이 남는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간판을 함께 넘기면, 대표 권한과 고객 신뢰까지 담보처럼 따라갈 수 있었다.

“자동으로 승계하지 않습니다.”

나린의 손이 명함 위에서 멈췄다.

“그럼 내가 만든 브랜드를 다른 사람들이 쓰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새 법인은 브랜드를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객과 별도 합의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럼 왜 새 법인을 만들어요?”

“회사 이름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작업과 임금을 남길 수 있는지 보려고요.”

나린은 웃지 않았다. 그 문장은 그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종류였다. 그래도 계약서 여백을 찢지는 않았다.

오지석이 현장 보드를 들고 들어왔다. 무지 포장 라인 아래에는 오늘 가능한 작업 시간이 적혀 있었고, 은박 라인 아래에는 장기 정지와 교육 준비가 남아 있었다.

“이 사람들은 새 법인으로 자동 이동하는 겁니까?” 지석이 물었다.

“아닙니다.” 태경이 말했다. “희망자만, 현재 계약과 임금 조건을 보여 준 뒤 선택합니다.”

“원래 회사에 남는 사람은요?”

“그 사람의 권리는 그대로입니다. 새 법인 선택을 퇴직이나 재고용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지석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는 보드 한쪽에 ‘새 구조 설명 희망’과 ‘기존 구조 유지’ 칸을 붙였다. 아직 자석은 없었다. 오늘 누군가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순간, 선택지는 두 개여야 했다.

채권자가 설비 목록을 넘겼다. “제어부는 무지 포장에도 필요하다면서요. 그걸 임대해 주면 기존 회사 채권은 어떻게 됩니까?”

혜린이 말했다. “임대료와 보증금, 반납 조건을 같은 손실표에 넣어야 합니다. 기존 회사 채권을 지우는 구조는 아닙니다.”

“그럼 우리 입장에선 손해 아닙니까?”

“기존 회사가 멈추면 제어부도 가치가 떨어집니다.” 태경이 말했다. “제안은 그 장비가 실제 작업을 만들 때만 임대료가 생기게 하는 겁니다.”

“안 되면?”

“반납과 점검 조건을 적습니다.”

태경은 쉽게 말하지 않았다. 새 법인도 실패할 수 있다. 그래서 첫 장에는 ‘성공 시’가 아니라 ‘작업 중단 시’가 먼저 적혀 있었다. 장비 반환, 미지급 임금, 고객 자료 반환, 작업자 선택 기록. 회사 이름을 바꾼다고 책임의 순서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린이 말했다. “내 브랜드는 새 법인에 넣지 않겠습니다.”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대신 고객에게는 뭐라고 합니까?” 채권자가 물었다.

“새 구조가 브랜드를 이어받는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작업 가능한 품목과 납기만 설명하겠습니다.”

“그럼 고객이 안 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나린이 말했다. “하지만 내 이름을 담보로 걸고 사람들 시간을 먼저 가져가진 않겠습니다.”

그녀가 말한 뒤에도 누구도 박수치지 않았다. 브랜드를 빼는 선택은 그녀에게 체면을 잃는 일이었고, 채권자에게는 더 적은 담보였다. 태경은 그 손실을 제안서의 여백에 적었다. ‘브랜드·상표: 자동 승계 없음, 고객별 별도 동의.’

현장 반장이 물었다. “무지 포장 라인만 가져가면 은박 라인 사람들은요?”

지석이 답했다. “은박 라인은 지금 가져갈 수 없습니다. 교육도, 장비도, 작업자 참여도 미정입니다.”

“그러면 일부만 살자는 거네요.”

“일부가 아니라, 확인된 것만 움직이자는 겁니다.”

태경은 그 표현을 적지 않았다. 말이 좋아도, 이동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손실이 남는다. 그는 제안서에 ‘별도 임대 구조는 기존 법인의 고용·퇴직·미지급 임금 책임을 면제하지 않음’이라고 넣었다.

작업자 대표가 보드를 보며 말했다. “새 구조 설명을 듣는다고 해서 옮겨야 하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혜린이 말했다. “설명에 서명하는 것과 선택에 서명하는 것도 나눕니다.”

“그럼 오늘은 뭐가 확정되는 겁니까?”

태경은 제안서의 마지막 줄을 가리켰다. “채권자에게 기능별 임대 검토를 제안하는 것. 그 외에는 확인과 동의가 필요합니다.”

채권자는 제안서를 덮었다. “개인보증은요? 대표가 보증하면 검토할 수 있습니다.”

나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자신의 개인채무 표를 가방에 넣어 둔 상태였다. 새 법인에 브랜드를 넣지 않겠다고 한 바로 뒤에, 다시 개인보증을 요구받았다.

“오늘은 답하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 제안도 답을 못 받겠네요.”

“보증을 넣으면, 제 개인채무와 회사 설비가 다시 한 표에 섞입니다.”

채권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경은 그 문장이 협상 카드처럼 쓰이는 것을 경계했다. 나린이 개인보증을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해서, 채권자가 제안을 거절할 권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보증 없는 구조와, 대표 권한 제한안을 함께 검토해 주십시오.” 태경이 말했다. “채권자 입장에서도 누가 단독으로 자산을 움직이는지보다, 어떤 설비가 실제 임대료와 작업을 만들 수 있는지가 확인돼야 합니다.”

“그 확인이 늦으면?”

“그때는 임대도 못 합니다.”

나린은 그 대답에 고개를 숙였다. 새 법인은 구원 문서가 아니었다. 회사 간판을 내놓고도, 보증을 거절하고도, 고객과 작업자가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구조였다.

채권자는 결국 제안서를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기능별 설비 목록, 희망 작업자 설명 절차, 임대료 우선순위를 이틀 안에 달라고 했다. 검토를 시작하겠다는 말도, 거절하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지석은 보드에 ‘설명 전’ 자석을 붙였다. 나린은 명함을 뒤집어 놓고, 고객에게 보낼 새 안내문 초안을 펼쳤다. 태경은 제안서 첫 장에 날짜를 적었다. 오늘 제안된 것은 회사의 미래가 아니라, 아직 이름 없는 기능 몇 개였다.

회의가 끝난 뒤, 혜린은 채권자에게 보낼 첨부 자료를 세 묶음으로 나눴다. 설비 기능표, 작업자 설명 절차, 기존 회사 책임표. 그녀는 새 법인의 예상 매출을 크게 쓰지 않았다. 확인된 소량 주문 하나와, 아직 고객 동의가 없는 가능 주문을 같은 줄에 놓으면 전시회 선매출과 다를 바 없었다.

태경이 물었다. “채권자가 가장 먼저 볼 건 담보 아닙니까?”

“그래서 담보가 아닌 설비 기능부터 보게 해야 합니다.” 혜린이 말했다. “제어부를 가져가면 무지 포장이 멈추고, 은박 전용 가드를 그대로 두면 안전 비용은 남습니다. 어느 쪽도 공짜 담보가 아니에요.”

나린은 그 말을 듣고 장비 목록에 자신의 도장을 찍지 않았다. 대신 ‘대표 확인: 기능 분류 사실 검토 중’이라고 적었다. 자신이 만든 설비의 이름 옆에서, 대표라는 칸이 예전보다 작아 보였다.

현장 반장은 작업자 대표와 함께 보드를 보았다. ‘설명 전’ 자석 아래에는 무지 포장 경험자 세 명, 정비 준비 가능자 두 명, 은박 라인 교육 희망 미정이 적혀 있었다.

“내가 무지 포장만 하겠다고 하면, 나중에 은박 라인으로 못 돌아가요?” 한 작업자가 물었다.

지석은 바로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은박 라인이 돌아올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무지 포장 설명을 듣는 겁니다. 은박 라인 교육과 참여는 나중에 따로 묻습니다.”

“그럼 임금은?”

“새 구조가 생겨도, 오늘 임금과 기존 미지급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혜린이 말했다. “조건을 보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작업자는 자석을 움직이지 않았다. 설명을 듣는 일이 곧 옮기는 일이 아니라는 말을, 종이와 보드 모두에 남긴 뒤에야 선택이 시작될 수 있었다.

태경은 고객 목록을 열어 두었다. 무지 포장 고객에게 새 구조 이야기를 미리 할 필요는 없었다. 법인이 바뀐다고 해서 고객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고객에게 보낼 문장에서 회사 이름을 빼고, 가능한 품목·확정 수량·문의 창구만 남겼다.

나린이 그 문장을 읽었다. “브랜드도 회사 이름도 없네요.”

“고객이 아직 동의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럼 내가 만든 건 어디에 남습니까?”

태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능을 남기는 구조는, 누군가의 이름을 남긴다는 약속이 아니었다. 나린은 그 침묵을 듣고도 안내문을 찢지 않았다. 대신 ‘나린패키징’이라 적힌 발신자 칸을 비워 두었다.

그날 저녁, 채권자에게서 다시 메일이 왔다. 개인보증 없이 검토하되, 대표의 단독 설비 처분 제한이 문서로 확정돼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나린은 그 문장을 읽고 오래 답하지 않았다.

“보증은 거절했는데, 통제권은 더 내놓으라고 하네요.”

“채권자가 조건을 바꿀 권리가 있습니다.” 태경이 말했다.

“그럼 내가 거절할 권리도 있죠?”

“네.”

“거절하면?”

“새 구조는 시작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개인보증란에 사선을 긋고, 그 옆의 권한 제한안 초안을 다시 펼쳤다. 자신이 잃을 것이 보증 하나가 아니라, 회사 이름을 쓰는 방식과 설비를 움직이는 권한이라는 사실이 문서마다 다른 글씨로 남아 있었다.

지석은 마지막으로 은박 라인 쪽을 보았다. 정지등 아래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새 법인 제안이 통과돼도, 그 라인이 내일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보드에 ‘안전 교육 대상 미정’을 그대로 남겼다.

이번 화가 재미있었나요?

좋아요와 평점은 언제든 변경할 수 있습니다.

독자 평점 아직 없음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