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비싼 칸
회귀한 자금팀 대리는 망할 회사를 살리지 않는다 · 2026. 4. 28.
긴급대책회의 자료의 가장 비싼 칸은 현금 잔액이 아니었다.
“책임자” 칸이 비어 있었다.
오전 여덟 시, 회의실 창문에는 밤새 켜 둔 건물 불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 화면 위쪽에서는 61시간대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72시간 지급유예는 회사에 숨을 한 번 더 쉬게 해 준 것이지, 폐를 새로 달아 준 것은 아니었다. 태경은 현금 잔액 아래의 빈칸을 오래 봤다. 과거에도 회의실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을 봤다. 급한 숫자가 나오면 가장 아래 직급의 실무자가 마지막 서명을 맡는 방식으로.
“윤 대리가 실무 총괄을 하면 되겠네요.” 재무담당 임원이 말했다.
그 말에는 계좌 열람권도, 지급을 멈출 권한도, 잘못된 지시를 거절할 자리도 없었다. 다만 일이 틀리면 누가 설명할지가 있었다.
태경은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실무 총괄이라는 말이 뭡니까?”
임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현금표를 만들고, 각 부서 자료를 모으고, 필요하면 의견을 내는 거죠.”
“의견을 낸 사람이 책임집니까, 지급을 지시한 사람이 책임집니까?”
“지금 말꼬리를 잡을 때입니까?”
“지금 안 잡으면 61시간 뒤에 제 목을 잡게 됩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태경은 자료 첫 장을 넘겼다. 임원 성과급, 현장 임금, 동해유통 필수 납품, 윤성정밀 외상대금. 기존 표는 부서별 합계만 보여 주고 있었다. ‘영업부 지급’이라는 칸 아래에 누가 월급을 못 받고, 어느 납품이 멈추며, 어느 계약 위반이 생기는지는 없었다. 합계는 싸웠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맡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태경이 말했다. “계좌 열람권. 지급 보류권. 자료 요청권. 그리고 제 지시는 전부 서면으로 남깁니다.”
“대리가 조건도 거나?” 누군가 비웃듯 물었다.
태경은 빈 책임자 칸을 가리켰다. “그래야 대리로 끝납니다.”
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자기가 계좌를 열 수 없는데 현금이 빠져나가면, 그 손실을 막지 못한 사람으로만 남는다는 뜻이었다. 과거의 태경은 그 역할을 받아들였다. 직함이 없어도 실제로 일을 할 수 있다고, 한 번만 버티면 나중에 보상받는다고 믿었다. 결국 나중에는 책임만 남았고, 자신이 막지 못한 지급은 모두 자기 잘못처럼 장부에 적혔다.
경영지원팀장은 팔짱을 꼈다. “열람권을 주면 내용이 밖으로 새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안 주면 누가 무엇을 숨겼는지도 확인 못 합니다.”
“지급 보류권까지 주면 부서가 멈춥니다.”
“그래서 지급권은 달라고 안 했습니다. 멈출 권한과 기록을 달라는 겁니다.”
박혜린이 회의실 뒤편에서 조용히 메모를 했다. 태경은 그녀가 자기 편을 들어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제도 자신을 문서보존실 밖에 세웠다. 오늘도 같은 방식으로, 그가 요구한 권한의 하방을 먼저 계산할 것이다.
재무담당 임원이 입술을 다물었다. 실무 총괄이라는 모호한 제안은 회의록에서 지워졌다. 대신 ‘긴급 현금대책 데스크 책임자’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문구만 바꿔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태경은 그 아래에 권한과 제한을 적을 줄을 기다렸다.
회의는 지연됐다. 한 임원은 외부 회의가 있다며 자리를 떴고, 다른 임원은 본인 결재선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태경은 그들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명은 누구에게나 비용이었다. 다만 그 비용을 한 사람에게만 몰아 주는 방식이 회사의 관행이었다.
오전 아홉 시 이십 분, 혜린은 태경을 법무팀 옆 소회의실로 불렀다. 테이블 위에는 지명서 초안이 놓여 있었다. 세 장뿐이었는데, 각 장의 빈칸은 회의실보다 더 많아 보였다.
“지급 보류권은 단독으로.” 혜린이 말했다. “실제 지급은 법무 사전검토와 재무 이중 승인.”
태경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늦습니다. 72시간 안에 결재를 돌리다 끝나요.”
“그건 의견이고요.” 혜린은 붉은 펜으로 ‘지급’ 옆에 줄을 그었다. “늦어서 생기는 손실과 혼자 보내서 생기는 손실 중 무엇을 누가 부담할지 적으세요.”
“제가 보류를 남발하면 납품이 끊깁니다.”
“그래서 보류 사유는 남기고, 지급은 두 사람이 보게 합니다.”
혜린은 조항을 세 개로 나눴다. 첫째, 태경은 계좌 내역을 열람하고 항목별 지급을 보류할 수 있다. 둘째, 실제 이체는 법무 검토와 재무 승인 둘이 남는다. 셋째, 원본과 전송기록은 누구도 수정하거나 반출할 수 없고, 예외가 필요하면 시간과 이름을 붙인다.
“이건 저를 못 믿는 조항이네요.” 태경이 말했다.
“맞습니다.” 혜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저도 못 믿는 조항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데 시간을 쓰지 말고, 못 믿어도 망가지지 않는 길을 만들자는 겁니다.”
태경은 조항을 다시 읽었다. 첫 생의 자신은 이 문장을 듣고 법무를 원망했을 것이다. 자기만 급한 줄 모른다고. 그러나 혜린이 막는 것은 그의 속도가 아니라, 속도 끝에 남는 무기록의 구멍이었다. 그 구멍은 한 번 생기면 누군가가 자기 편이라는 이유로 돈을 빼 달라고 할 때마다 넓어진다.
“윤성정밀은요?” 태경이 물었다.
“현금표에 올립니다. 우선 지급은 아니에요.”
“아버지가 받으면 공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직원 임금보다 먼저입니까?”
태경은 대답을 늦췄다. 가족이라는 말은 표 위에서 유난히 빨리 커졌다. 동호가 보낸 전표에는 작업자 급여일도 함께 있었다. 아버지는 자기 공장만 살려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태경은 사진을 볼 때마다 아버지 목소리부터 들었다.
“아닙니다.”
“그 답을 문서에 쓸 수 있습니까?”
“씁니다.”
혜린은 빨간 펜 뚜껑을 닫았다. “그럼 이 조항은 통과시킬 수 있습니다.”
태경은 각 조항 옆에 이니셜을 남겼다. 속도가 느려지는 비용, 가족회사 우선 지급을 못 하는 비용, 나중에 자기 판단이 틀렸을 때 다른 두 사람이 그 판단을 보게 되는 비용. 이니셜은 동의의 표시였지만, 면책의 표시가 아니었다.
혜린이 마지막 장을 넘기며 말했다. “믿어서 막는 겁니다.”
태경은 펜을 멈췄다. “그 문장은 기록에 남기지 맙시다.”
“왜요?”
“기록에는 믿음 말고 조건을 남겨야 하니까요.”
혜린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조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신호였다.
오전 열 시, 공용 회의실 문패 아래에 종이 한 장이 붙었다. 긴급 현금대책 데스크. 어제까지 회의실이었던 방은 여전히 같은 테이블과 의자뿐이었다. 달라진 것은 중앙 화면에 계좌 잔액을 볼 수 있는 창이 하나 더 떠 있다는 것, 그리고 태경의 계정 옆에 ‘지급 보류 가능’이라는 작은 표시가 생긴 것이었다.
화면을 처음 열자 숫자가 쏟아졌다. 기존 현금표는 급여, 외주, 임원, 운송비를 모두 ‘지급 예정’이라고 불렀다. 태경은 그것을 사람·납품·계약 위반으로 다시 나누라고 지시했다. 누구의 일이 오늘 멈추는지, 어느 고객이 이미 받은 물건을 잃는지, 어떤 지급이 약속을 깨는지. 숫자는 그때서야 같은 크기가 아니게 됐다.
재무팀 직원이 물었다. “이걸 오늘 안에 다 분해합니까?”
“첫 줄부터 합니다.”
“누가 정합니까?”
태경은 지명서를 책상 위에 놓았다. 맨 아래에는 자신의 이름과 법무 검토자, 재무 승인자의 칸이 나란히 있었다.
“제가 보류 사유를 적습니다. 지급은 두 분이 확인합니다. 그리고 누구든 자료가 틀렸다고 말하면, 그 항목은 다시 열어 둡니다.”
그는 계좌 열람 창을 보다가 동해유통 예치금을 찾았다. 잠금계좌로 옮겨진 금액 옆에는 ‘임금·필수 납품 한정’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윤성정밀 전표는 그 아래에 남아 있었다. 태경은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밀어내는 것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은 달랐다.
첫 번째 지급표가 화면에 올라왔다. 임원 성과급. 현장 임금. 같은 지급일, 다른 설명. 성과급은 이미 결재된 약속이라고 적혀 있었고, 임금은 지연 시 작업이 멈춘다고 적혀 있었다. 둘 다 돈을 요구했지만, 하나는 다음 분기의 평가를 잃고 다른 하나는 이번 달 생활을 잃는다.
태경은 보류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과거의 자신은 이때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렸을 것이다. 더 높은 사람이 책임져 주기를, 아버지가 먼저 연락해 주기를, 임원이 자기 이름으로 결정을 내려 주기를. 지금 화면에는 그런 사람의 칸이 없었다.
그는 성과급 항목을 보류로 바꿨다.
시스템이 이유를 요구했다. 태경은 천천히 적었다. ‘잠금계좌 용도와 현장 임금 우선 검토가 끝날 때까지 보류. 법무·재무 이중 승인 전 집행 금지.’
보류 표시는 노란색으로 남았다. 돈이 직원에게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과급이 먼저 나가는 길은 닫혔다. 그 작은 변화 때문에 회의실 밖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자신의 계약을 언급했다. 태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음 줄에는 현장 임금이 있었다.
책임자 칸에 윤태경의 이름이 들어갔다. 계좌 열람권과 지급 보류권이 함께 활성화됐다. 그 아래에는 법무 검토와 재무 승인 칸이 비어 있었다.
새 현금표 첫 줄에는 ‘임원 성과급’과 ‘현장 임금’이 나란히 떠 있었다.
태경은 두 줄 사이의 빈 공간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 빈칸을 혼자 메우지 않기로 했다.
잠금계좌 창 오른쪽에는 유예 종료 시각이 계속 줄어들었다. 새 직함은 그 숫자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다만 누가 숫자를 보고 무엇을 보류했는지는 이제 남는다. 태경은 처음으로 그 기록이 자신을 묶는 동시에, 다음 사람에게 선택할 자리를 남긴다는 것을 알았다.
문밖에서 재무팀 직원이 수정된 표를 들고 들어왔다. 현장 임금의 대상 인원과 필수 납품의 도착 시간이 적혀 있었다. 아직 계산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합계 뒤에 가려졌던 사람들의 이름이 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태경은 그 이름들을 읽고 나서야 보류 사유를 다시 확인했다. 책임은 빈칸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보이는 이름을 끝까지 지우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표를 저장하고, 다음 확인 시각을 오전 열한 시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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